원혼비(冤魂碑). 대구 민간인 학살지에도 70년 만에 백비(白碑)가 들어섰다.
이름도 무덤도 없이 희생된 수 많은 무명의 넋이 국가에 묻는다. 나는 누군인가. 왜 여기에 묻혔는가. 구순을 앞둔 노인은 70년 전 자신이 직접 구덩이를 파낸 뒤 땅 속에 묻은 이름도 모를 희생자들에 대한 아픈 기억을 더듬으며 백비 앞에서 한맺힌 증언을 했다. 백비의 질문에 이제 정부가 답할 차례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 전국유족회(상임대표 윤호상)'가 꾸린 '백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지 위령순례단'은 지난 30일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부 하에서 우리 국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됐던 대구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지인 가창댐 맞은편(달성군 가창면 용계리 138-1)과 대한중석광산 옛터(달성군 가창면 상원리 산 99-3)에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는 하얀색 백비 2기를 세웠다. 정부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진상규명과 과거사기본법 재개정 촉구가 목적이다. 당초 대구형무소 옛터인 중구 삼덕동2가 삼덕교회 인근에도 세우려 했으나 여건이 되지 않아 2기만 세우게 됐다.
백비를 세우는 자리에는 유족들과 당시 사건 목격자 등 20여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백비를 설치하기 전 각 장소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목격자 증언을 들었다. 순례단은 지난달부터 대구경북을 비롯해 전국 민간인 학살지에 백비를 세우고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10월 판문점 일정을 끝으로 해산한다.
특히 이날 대구에서는 1953년 오뉴월 쯤 당시 22살로 중석광산 경비였던 서상일(87)씨가 종전을 앞두고 광산 근처에서 군복을 입은 이들이 민간인을 사살한 것을 직접 본 사실을 증언했다. 또 자신이 직접 그 시신을 묻었다고도 했다. 서씨는 골짜기를 가르키며 "계곡 가장자리 군복입은 이들이 사람들을 세우고 총을 쐈다"며 "그들이 떠나면 경비들이 땅을 파고 시신들을 묻었다"고 했다. 또 그는 계곡을 가로질러 학살지로 추정되는 광산 앞 화약창고 터로 올라간 뒤 "누런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비녀 꼽은 아낙네, 어린 학생들도 있었다"면서 "죽을 죄를 지을 사람들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한편,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950년 7월 대구형무소 재소자 1천여명이 경산 코발트광산, 대구 가창골, 칠곡군 신동재 등에서 집단 사살됐다"고 규명했다. 진화위는 형무소 수용인원(1800여명)의 2배가 넘은 4천여명이 수감된 것으로 보고 있다. 대구 10월항쟁, 제주 4.3항쟁, 국가보안법 위반 재소자, 국민보도연맹원 등 '좌익사범'으로 몰린 이들이 대다수다. 하지만 최대 1만여명의 시신이 묻힌 것으로 추정되는 가창골은 1959년 댐이 들어서면서 조사와 유해 발굴이 불가능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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