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살인, 32년만에 '무죄'

평화뉴스
  • 입력 2007.01.2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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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법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1.23) '무죄'

'사법살인'.
8명의 목숨을 앗아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32년 만에 법원에서 오명을 벗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오늘(1.23) 오전 10시 '인혁당 재건위 사건 재심 사건' 선고 공판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1975년, 긴급조치 1호 위반 등의 혐의로 여정남.도예종씨를 비롯한 8명에 대해 사형이 집행된 지 무려 32년 만이다.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희생자들...
1975년 4월 9일, '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희생자들...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조작사건'은, 지난 1974년 중앙정보부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인민혁명당 재건위를 구성해 국가전복을 꾀했다”고 발표한 뒤, 이듬 해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인 4월 9일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해 사형이 집행된 사건으로, 국내외 법조계에서는 이를 '사법사상 암흑의 날', '사법살인'으로 부르고 있다.

특히, 이 사건으로 희생된 도예종.서도원.송상진(영남대), 여정남(경북대)씨를 비롯한 4명이 대구경북 출신이다.

이 사건은,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직권조사를 통해 "중앙정보부의 고문과 증거조작, 공판조서 허위 작성, 진술조서 변조, 위법한 재판 등에 의해 조작됐다"고 밝힌데 이어, 2005년 12월 7일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도 "수사지침에 따라 고문과 가혹행위가 자행됐다"며 '사건 조작'을 인정했다.

이어, 서울중앙지법이 지난 2005년 12월 27일, 인혁당 조작사건 30년만에 '재심 개시'를 결정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길이 열렸고, 이듬 해 2006년 12월 18일 서울중앙지법에서 결심공판이 열렸다. 당시 검찰은 구형 대신 “법과 원칙에 따라 현명한 판단을 해달라”며 이례적으로 ‘구형’을 하지 않았다. 검찰은 “과거 기록이나 재심 공판에서 당시 수사기관의 고문 등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나타났고 적법절차가 준수되지 않았다는 증인 진술도 있었다”며 수사와 재판과정의 잘못이 있었음을 사실상 인정한 셈이다.

이에 앞서, 2006년 1월 23일,도예종씨를 비롯한 인혁당재건위 사건 관련자 16명이 사건 발생 30여년만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돼 명예를 회복하기도 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2006년 1월 23일, 인혁당 관련자 서도원, 도예종, 하재완, 송상진, 여정남, 정만진, 전재권, 이태환, 장석구, 이창복, 전창일, 강창덕, 라경일, 이재형, 김종대, 임구호씨를 포함한 16명에 대해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또, 인혁당 재건위 사건과 관련해, 사형이 집행된 인사들의 유가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340억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기도 했다. 당시 사형당한 우홍선씨 부인 강순희(74)씨를 비롯한 유가족 45명은 2006년 10월, 서울중앙지법에 낸 소장에서 “국가기관 자체 조사 결과,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국가의 불법행위로 인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임이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이번 소송에는 사형당한 8명의 유가족들이 모두 참여했으며, 가족별 손해배상 청구액은 36억~48억원이다.

한편, 모교 출신 동문이 인혁당으로 희생된 지역 영남대와 경북대가 '4.9통일열사 추모공원'을 추진하고 있다.

영남대는 인혁당 희생자를 비롯한 민주화운동에 힘쓴 동문을 기리는 ‘민주화 공원’을 대학 안에 짓기로 했다.
영남대 민주동문회와 총학생회를 비롯한 영남대민주단체협의회와 대학본부는 2006년 ‘공원조성위원회’를 구성하고, 인혁당 조작사건으로 사형된 동문 3명에 대한 '4.9통일열사 추모공원'을 그 안에 가장 먼저 짓기로 했다.

또, 경북대 동문들도 '추모공원' 추진을 논의하고 있다.
경북대 출신인 함종호(4.9통일열사추모제준비위원장)씨는, "인혁당으로 희생된 여정남 선배를 기리는 추모공원을 추진하기로 하고, 경북대 출신 민주화 동문들의 뜻을 모아 대학측과 협의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글.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pnnews@pn.or.kr / pnnews@hanmail.net



- 인혁당 재건위 희생자 -

서 도 원 (당시 52세)
1923년 3월 28일 경남 창녕군 대합면 신당리 출생
대구매일신문 기자
4.19 이전 청구대학교 (현 영남대학) 학생주임, 정치학 강의
4.19 이후 민주민족청년동맹위원장
5.16 이후 혁명재판에서 7년 언도, 2년 7개월 복역
1967년 국가보안법 사건으로 구속, 무죄판결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 사건으로 구속 당시 침술사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 집행 (경남 창녕 선산에 안장)

도 예 종 (당시 51세)
1924년 12월 25일 경북 경주시 서악 출생
대구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4.19 이전 대구대학교 (현 영남대학) 경제학 강사
4.19 이후 경북 영주군 교육감 당선, 민주민족청년동맹 간사장
1964년 소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3년형 (당시 삼화건설 회장)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사건으로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

송 상 진 (당시 47세)
1928년 9월 18일 대구시 동구 백암동 출생
대구사범 대구대 경제학과 졸업
공산초등학교, 대구초등학교 교사
4.19 이후 교원노조활동 및 민주민족청년동맹 총무국장
1964년 소위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연행, 무혐의 석방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양봉업)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

우 홍 선 (당시 44세)
1931년 출생
6.25 당시 고교생으로 학도의용군으로 참전, 육군대위 예편
4.19 이후 통일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장 역임
5.16 이후 수배
1964년 1차 인혁당사건으로 구속 1년형, 집행유예로 석방.
(당시 골든 스탬프사 상무)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하 재 완 (당시 43세)
1931년 1월 10일 경남 창녕군 이방면 안리출생
단국대학교 졸업
1950년 입대
1957년 중사 제대, 양조장 경영
4.19 이후 민주자주통일협의회 경상북도 협의회 부위원장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 사건으로 구속 (당시 건축업)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4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 현대공원에 안장)

김 용 원 (당시 40세)
1935년 경남 함일군 출생
서울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4.19 이후 서울대 학생민통련 참가
5.16 이후 연행, 조사받고 나옴
1964년 소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연행, 조사받고 나옴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경기여고 교사)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이 수 병 (당시 39세)
1936년 12월 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생
부산사범, 경희대학교 졸업
4.19 이후 경희대학교 학생민족통일연맹 위원장.
5.16 이후 구속, 혁명재판에서 15년형 선고, 7년 복역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삼락 일어학원 강사)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경남 의령군 신반리에 안장)

여 정 남 (당시 30세)
1945년 5월 대구시 남일동 출생
경북고, 경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입학
1964년 6월 3일 한일회담 반대투쟁 주도이래 학생운동으로 3번 제적, 군입대
1969년 복학
1971년 4월 정진희 필화사건으로 구속
1972년 11월 10일 유신반대 포고령위반으로 구속
1974년 4월 인민혁명당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확정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1975년 4월 9일 사형집행 (대구 칠곡현대공원에 안장)

장 석 구 (당시 48세)
1927년 9월 19일 서울 출생
1949년 7월 단국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9월 평화신문사 기자
1955년~61년 한국일보 대구지사장, 대구일보, 민족일보 기자
1962년~63년 대구 매일일보 기자
1963년 이후 한일협정 반대와 3선개헌 반대운동에 참가
1974년 6월 14일 인민혁명당 재건위구속
1975년 10월 15일 서울 서대문구치소에서 옥사

전 재 권 (당시 59세)
1927년 10월 12일 경북 상주 출생
6.25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5년 복역, 동아일보 대구주재 기자
4.19 사회당 참여 (양복 옷감 도매상)
1974년 4월 인혁당 재건위 구속, 15년형 선고됨
1982년 3월 2일 형집행정지로 석방
1986년 5월 7일 복역 후유증으로 병사

유 진 곤 (당시 51세)
1937년 4월 4일 경남 김해 출생
1953년 4월 부산 사범학교 입학
1954년 부산사범 사회과학 이론연구회 '암장' 회원
1956년 부산 사범 졸업, 울산 신암국교 재직
1964년 김해연구소 재직
1974년 5월 1일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 무기형
1982년 12월 13일 형 집행정지로 출소, 투병생활
1988년 5월 5일 옥중 생활 후유증으로 운명

이 재 문 (당시 47세)
1934년 경북 의성 출생
1964년 1차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
1971년 민주수호 경북대구협회 선전부장
1979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사건으로 구속
1980년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
1981년 10월 22일 서대문 구치소에서 옥사 (백석 천주교 묘지에 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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