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과거? 추악한 과거!"

평화뉴스
  • 입력 2007.02.12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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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 칼럼]...
"야만의 시대를 실속 없이 그리워하는 사회, 미래는 없다"


옛날은 흔히 실제보다 아름다워 보인다. 하루라도 빨리 끝났으면 했던 군대생활조차 한참 지난 다음에 돌아보면 아름다운 추억거리가 되어 있다.

하지만 좋은 쪽으로 보려고 노력해도 아름다워지기 어려운 괴로운 경험들도 있다. 우리는 흔히 그런 것들을 입 밖에 꺼내기조차 싫어 의식 저 밑바닥에 감추어두곤 한다. 그럴수록 그로 인한 마음의 병은 또 다른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듯하다.

‘타인의 삶’이라는 영화가 있다.
구 동독의 암울한 억압상황을 생생하게 그려내는 진지한 작품으로, 비밀경찰과 반체제 작가 사이의 미묘한 관계가 골격을 이루고 있다.


작가를 도청하고 감시하던 유능한 비밀경찰이 작가의 입장에 동조하게 되고, 오히려 당 지도부에 대해 회의를 느껴 작가를 돕는다. 이러한 반전보다 인상적인 것은 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이, 성생활까지 모두 도청된다는 점이다.

미모의 여배우인 작가의 아내가 작가를 보호하기 위해 권력자에게 몸을 바치다 괴로워 자살하는 모습은 박정희 시절 궁정동 안가를 드나든 무수한 여인들을 연상시켜 그냥 재미거리로 보아 넘기기 어렵다. 작품에서 생생히 체험할 수 있는 권력의 추악함은 어떤 식으로도 미화될 수 없어 보인다.

속도감도 있고, 극적인 긴장과 반전도 있어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는 영화지만, 대박을 터뜨려줄 만한 오락성은 갖추지 못한 셈이다. 오히려 암울하고 심리적인 부담감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는 거북한 느낌을 안겨주기 쉬울 것 같다. 실제의 역사적 현실이라는 것이 실은 그렇게 아름다웠던 적이 별로 없었고, 그 진실을 맨얼굴로 대면하는 것은 대개 거북하고 우울한 일 아닌가.


"이렇게 살게 된 게 모두 박정희 덕?"

우울한 것은 영화 속의 절박한 상황,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도청할 수 있고, 국가 원수나 정부나 체제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처벌감이며, 권력자의 눈에 찍히면 가정은 물론이고 목숨조차 온전히 보전하기 어려웠던 상황이 먼 남의 나라 이야기이기 이전에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그런 야만을 자행했던 당사자들이 오늘의 민주사회 속에서도 멀쩡히 기세등등하게 지배층으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 괴로움의 더 큰 원인이다. 그 치부를 드러내어 이제라도 좀 치유하려고 할 때마다, 그래도 그때가 더 좋았다느니, 박정희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살게 되었는데 왜들 그러느냐느니 하는 볼멘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어 괴로움은 또 배가된다.

그 시절을 아름답다고 여겨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현재와 미래는 더욱 암울해 보일 것이다. 지난날의 고통을 망각하고 과거를 턱없이 아름답게 윤색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명백했던 야만의 시대를 실속 없이 그리워하도록 만들어놓는 사회적 메커니즘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지 않고는 우리 사회의 미래도 없다.

그 시절에 한몫 챙겨 지금도 잘 먹고 잘 살면서 그 때만큼 재미를 보지 못해 억울해 하는 사람들이 그 좋았던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러려니 하자. 그렇지도 못하면서, 그 시절 주린 배를 안고 뼈 빠지게 일해 겨우 먹고 살 만하게 된 사람들이 자신과 부모 형제와 이웃들의 노력을 천시하고 이렇게 살게 된 게 모두 박정희 덕이라고 우기는 이 유사종교 현상에 대해 신학만 아니라 정신분석과 정치경제학과 사회학과 온갖 과학이 공조하여 제대로 된 해석과 대책을 만들어내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인혁당 재조명조차 정략?"

그 해답을 인간 본연의 욕망구조에서 찾든, 환상에서 구하든,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 분석으로 치고 들어가든 한 가지 객관적 수치만은 못 박아 놓고 시작했으면 좋겠다.

권력자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고, 국민들은 목숨을 걸 용기 없이는 어떠한 반대목소리도 낼 수 없었던 유신 철권통치의 시절 18년, 그보다 더 무식했던 전두환 정권 7년, 이와 별반 다를 바 없었던 노태우 정권 5년, 도합 30년 동안 국민들은 진실과 비판에 대해 귀를 막고 입을 닫은 채 살았다. 그 사이에 박정희는 교주로, 구세주로 미화되었다. 그래도 그 세월이 30년밖에 안 되기에 지지율이 겨우 70% 언저리일 것이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그렇게 반세기를 넘긴 덕분에 박정희를 훨씬 능가하는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지 않은가.

집권야당의 강력한 대권후보 박근혜 의원은 인혁당사건에 대한 재조명조차 자신을 겨냥한 정략이라고 주장했다.
뻔뻔하지만 맞는 말이다. 정치판에 정략 아닌 것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자신의 주장만은 정략이 아니라는 논지의 발언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말이기도 하다.

정치적 치부를 덮어두자는 주장은 정략이 아니고 또 무엇인가.
멀쩡한 사람들을 고문하여 간첩 만들고 법의 이름으로 학살하면서 정권을 유지했던 박정희의 정치행위는 도대체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술자리에서 오간 불평과 욕설만으로 몇 년씩 감옥살이를 시킨 유신의 야만에는 정치적으로 어떤 이름을 붙여주어야 한단 말인가.


"나치를 그리워하는 독일인도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그다지 높지 않다"

온 세상이 기억상실증을 고무찬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주 EBS에서 방송된 나치 강제수용소 관련 타규멘터리 크즈(KZ)는 기억이 어떻게 사회적으로 꾸준히 재생산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독일도, 특히 구서독은 나치의 야만을 깔끔하게 청산하지는 못했다. 히틀러를 숭배하고 나치시절을 그리워하는 독일인들도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그다지 높지 않다.
과거를 파묻어 버리기보다는 야만과 치욕의 역사를 돌이켜보고 반성할 수 있도록, 끔찍한 유대인 학살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하고 후세들에게 그 참상을 생생히 체험시켜주려는 독일 사회의 노력이 인상적이다.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것은 미래를 위한 일이다.
세월이 지나도 아름답다고 미화될 수 없는 짓들을 저지른 사람들, 자신의 권력을 위해 남의 삶을 짓밟은 사람들, 또 이들 덕분에 오늘날까지 부와 권력을 누려온 사람들은 이제라도 진정으로 반성하고 자숙해야 마땅하다.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과거의 야만을 기회가 되면 다시 저지르겠다는 무언의 시위나 다를 바 없다.

우리 사회의 민주역량이 그러한 야만을 그냥 용납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제대로 된 역사적 심판을 착실히 준비하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홍승용 칼럼 30]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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