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나는 광주 진압군이었다”

평화뉴스
  • 입력 2004.05.18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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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공수부대원이었던 대구 강모씨(45)
...“우리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





벌써 24년. 그러나, 강모씨(45)는 해마다 5월이 되면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다. 언제나 정확하게 되돌아오는 시계바늘처럼, 왠만하면 잊혀질 법도 한 아픈 상처가 어김없이 되살아난다. 남을 때리고 마음 편할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자신의 손에 피흘리던 사람의 기억은 왜 이렇게 질기도록 지워지지 않는 것일까. 살아남은 사람의 이깟 착잡함이야 죽은 이들 어디에도 비길 수 있을까만은, 이제는 털고 가고 싶은 멍에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오히려 그 무거운 마음의 짐을 당장이라도 내려놓고 싶을 뿐이다.

지난 ’80년 5월 광주. 당시 공수부대원으로 진압에 나섰던 강씨는, 24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일을 떠올리기 싫어했다. 자신의 총과 진압봉에 피흘리던 시민들, 그리고 명령에 따라 나섰다 숨져간 동료 상병. 해마다 5.18이 되면 죄인같은 마음으로 지내야 하는 강씨. 그리고 이제는 말한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고, “군인은 절대 나서서는 안된다”고...

대구에 사는 강씨를 만나, 진압군으로 나섰던 5.18 당시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누군가에 의해 가해자로 남은 그의 이야기를 통해, 더 이상 되풀이되지 말아야 할 우리 현대사의 상처를 보듬고자 했다. 조심스레 털어놓는 그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 당시 어떻게 광주에 가게 되었나?

= 대구에서 대학(당시 2학년.22살)을 다니다 강원도에 있는 모 공수여단에 입대했는데, 5월 중순쯤에 갑자기 우리 여단이 광주에 파견됐다. 우리 부대는 광주에 있는 한 대학교 운동장에 머물며 금남로와 충장로, 전남도청 일대의 데모진압에 나섰다. 또, 광주를 오가는 길목을 지키며, 당시 시민군들이 광주를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기도 했다. 그 때 나의 계급은 상병이었고, 도청은 시민군 손에 넘어가 있는 상태였다.

- 그 때 어떤 교육을 받았나?

= 광주에서 불순분자들과 북쪽 간첩들이 배합전술을 펼쳐 내란을 일으켰다고 들었다. 또, 이런 광주사태가 전국으로 번질 수 있고, 국가의 운명이 귀관들의 어깨에 달려있다는 식의 교육을 받았다. 이른바 정훈교육이었다.

- 광주를 오가는 길목에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보았는가?

= 내가 직접 경험한 사실이다. 우리 부대는 광주에서 전라남도 여천쪽으로 나가는 길목을 지켰는데, 여천에는 큰 화학공단이 있었다. 시민군들이 이 화학공단으로 빠져나가면 더 큰 위험이 닥친다는 명령을 받았고, 단 한명이라도 내보내면 군법에 회부된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철통같이 지키게 됐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가 바리케이트를 치고 있는 곳에 버스 한대가 돌진했다. 멈추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서지 않아 결국 소총으로 사격했다. 상명하복의 군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버스에는 시민군 7-8명이 타고 있었는데, 일제 사격에 의해 몇 명은 죽고 몇 명은 크게 부상당했다. 그들이 탄 버스 의자 밑에는 소총들이 놓여 있었다. 이 일은 국회 청문회 때도 나온 내용이다.




- 광주의 시위 진압 때도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 않았나?

= 참 못할 짓이었다. 금남로나 충장로, 도청 일대에는 데모가 많았다. 그런데, 요즘같은 평화적인 시위가 아니라, 화염병과 돌, 날까로운 흉기 같은 것들이 날아들었다. 서로가 밀리면 죽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내 동기(당시 상병) 한명이 시위대에서 돌진하는 차량에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다. 차마 눈뜨고 못볼 정도로 참혹했다. 나를 비롯한 부대원들이 모두 위협을 느꼈고, 시위대에 대한 감정도 격해졌다. 나도 시위대를 모질게 때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못할 짓이었지만, 그때 분위기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피흘리는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 당시 진압군인들이 환각제 같은 약을 먹었다는 말이 있다. 사실인가?

= 솔직히 다른 부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부대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몇날 몇일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고, 식사도 건빵 같은 것으로 대충 때웠다. 모두들 피곤에 지쳐있었는데, 잠을 자지 못해 눈이 많이 충혈돼 있었다. 그런 것을 보고 시민들이 말을 한 것 같다. 지금 와서 뭘 숨기겠나. 절대 약을 먹거나 환각상태에서 진압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환각제를 먹고 시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말을 듣기는 들었지만, 나는 전혀 보지 못했다. 믿고 싶지도 않다.

- ’80년 그때를 돌이켜보면 어떤가?

= 착잡할 뿐이다. 나는 누구를 두둔하기도 싫고, 누구의 주장에 반박하기도 싫다. 서로가 큰 아픔을 갖고 있는 것이고 모두가 피해자다.
제대한 뒤에 안 사실이지만, 전두환과 군부는 광주사태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우리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전두환)의 집권과정이 정말 잘못됐다. 정말 그 당시에 군대가 광주에 갈 필요가 있었는가. 사태만 더 키웠을 뿐이고, 그런 점에서 보면 그들이 집권을 위해 군대를 이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분명히 확신한다. 군대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런 곳에 가면 안된다. 군대는 적군을 막기 위해 있는 것이다. 왜 군대가 시민들의 시위현장에 가야 하는가.
우리(진압군)도 피해자다. 불명예스런 군인으로 남았고, 시민들을 때리고 죽이는 악역을 했다. 모두가 집권자, 정치인들의 잘못이다. 적어도, 정치적 목적을 위해 국민을 선동하거나 이용해서는 안된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강씨는 5.18이 10년쯤 지난 ’90년대 초에 광주를 찾았다고 한다. 망월동 묘지에도 가보았지만 역시 착잡한 마음 뿐이었다. 강씨는 인터뷰 내내 조심스레 말했고, 본인의 이름이나 부대명을 쓰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24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그런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광주 5.18. 모두가 상처를 안고 산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죄없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게 만들고, 그들의 삶에 피의 멍에를 지운 이들이 있다. 그들이 역사 앞에, 적어도 죄없는 사람들 앞에 진심으로 참회하는지 묻게 된다.
5월 광주의 혼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아직도 참회와 민주를 요구하고 있다.

글.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pnnews@pn.or.kr
사진은 <광주민중항쟁의 시각언어공장>(www.iam518.com)에 실린 광주민중항쟁자료사진집 <오월광주> 사진 가운데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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