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을 활용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조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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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민주주의 퇴행..정당을 통해, 비판적으로, 조건부로 실천할 필요가 있다"

"시장의 승리 만 남고 중산.서민층은 더 궁핍"

벌써 한 해가 지나고 기축년 새해가 밝았다. 1년 전 화려하게 등장한 이명박 후보는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530만 표라는 가장 큰 표차로 승리했다. 적어도 그는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합법적 대통령임에 틀림없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그가 국민을 이토록 철저하게 배신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심지어 우리는 “선거 때는 무슨 말이나 할 수 있는 것 아닌가?”라고 말하는 사람을 지도자로 뽑지 않았던가. 그만큼 우리들의 물질적 욕망에 대한 기대치는 크지 않았던가. ‘경제살리기’란 얼치기 조작 광고에 현혹되어 모든 민주주의적 가치들을 내팽개치고 선택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모두가 부자가 되리라고 기꺼이 헛발질 하지 않았던가. 돈만 많이 벌 수 있다면 시민권이 상업화되어도 좋다고 인정하지 않았던가. 공공의 것을 사적 소유로 바꾸는 수탈 경제인 금융시장 자본주의를 아낌없이 용인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소수의 부유층에는 세금 세일, 서민에겐 복지 축소를 선사하고 ‘선진화’라는 미명하에 267조원 규모의 공기업들을 매물로 내놓아도 아무런 저항의 흔적이 없다. 20년 전 피와 땀으로 이룬 ‘민주주의’와 ‘정치’의 주체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민주화의 일시적 지체는 있어도 결코 후퇴는 없을 것이라는 확신에 찬 믿음은 어디로 갔는가? 남은 것은 ‘민주주의 역진론’과 ‘정치 위기론’의 신음소리들 뿐이다. 정치적 퇴행과 파시즘의 유령들이 우리 사회를 배회하고 있다.

지난 이명박 정부의 1년은 오직 ‘경제살리기’란 구호의 전면화 아래 소수의 보수.우익 지배계층과 ‘2% 부자’들의 이익 기반을 구축한 한 해였을 뿐이었다. 핵심 지지층의 이해를 대변하는 종부세를 무력화함으로써 ‘부자 감세’의 목표를 성취했고, 향후 관련법 개정 등을 통해 소수 기득권층의 이익 지키기는 더욱 더 공고화될 것이다. 비록 그 반작용으로 지지율은 추락하겠지만 현 정부는 자신들의 이익기반 확장과 기득권 유지를 위해 이를 과감하게 밀어붙일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정치의 퇴행은 분명할 것이며, 시장의 승리만 남을 것이고, 냉혹한 경쟁 시장에서 밀려난 힘없는 중산·서민층의 삶은 갈수록 궁핍해질 것이다.

또한 현 정부는 보수.수구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기 위해 한편으로 촛불시위 참가자에 대한 수사, 방송.집시법 개정안 파동, 역사교과서 파동, 과거회귀법 강행 등으로 심각한 사회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다른 한편 국가정보원.검찰.경찰.국세청.감사원 등 이른바 권력기구의 정권 사유화 경향을 노골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촛불시위 참가자들에 대한 탄압에서 보듯 우선 일차 폭력 수단인 경찰력을 동원해 반대 세력을 물리적으로 억압하고, 뒤이어 검찰이나 국세청 감사원 등의 이차적 정치권력 수단을 이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축소되었던 국정원 권력의 전면 배치는 과거 정보정치의 부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선출된 정부가 국민을 배신하는 상황"

이러한 이명박 정부의 :성격을 전규찬은 소통과 합의가 사라진 정치 부재의 통제 상태, 즉 ‘치안 스테이트’로 규정한다. 그가 말하는 치안 스테이트는 사회적 공포를 조장해 안전과 공익에 대한 허구적 합의를 만들어내고, 이를 통해 강압적 공권력이 전면화하는 예외적 통치 상황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따라서 “2008년 한국에서 목격되는 인터넷 검열과 매스컴 통제, 낙하산 인사와 공영방송 해체의 모습들은 결코 우발적이지 않은 ‘신자유주의 치안 스테이트’의 징후이자 산물”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우리 사회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을까? 민주주의의 부분 고장인가 아니면 전면 사망인가? 콜린 크라우치는 이러한 현상을 ‘포스트민주주의’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분석한다. 그가 말하는 ‘포스트민주주의’란 선거 절차와 같은 형식적인 민주주의나 법치 국가의 성격을 유지함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이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도달하려 한 목적을 선출된 정부가 역설적으로 배신하는 상황을 규정하는 말이다. 말하자면 “민주주의 시기 이후의 지루함, 좌절, 환멸이 발생한 상황, 강력한 소수집단이 정치 시스템이 자신들을 위해 작동하도록 다수인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상황, 정치계급이 대중의 요구를 관리하고 조작할 줄 알게 된 상황, 하향식 공공 캠페인을 진행하여 사람들이 투표하도록 설득해야 하는 상황”을 뜻한다. 물론 이 개념은 서구 민주주의의 분석틀이긴 하지만 현재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역진을 들여다보는데 유의미성을 갖는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포스트민주주의의 원인이 되는 가장 강력한 힘은 ‘경제적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경제적 세계화 과정에서 민간 다국적 기업들은 아무런 장애 없이 국민 국가의 통치력을 벗어나서 성장한다. 장 지글러는 이처럼 새롭게 등장한 민간 다국적 기업들을 가리켜 ‘세계화 지상주의자’, 즉 ‘코스모크라트cosmocrate’라 부른다. 이들은 한 국민 국가의 규제나 세금이 싫으면 다른 국가로 떠나겠다고 협박함으로써 더 많은 국가들이 투자를 끌어들이기 위해 다국적 기업에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며 경쟁하도록 만든다. 기업 프렌들리를 외치는 이명박 정부 역시 이러한 외부적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삼성을 비롯한 대재벌이 한국 정치를 접수한지가 언젠가. 당연히 민주주의와 정치는 세계화를 향한 자본주의의 전면적인 공격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다. 다국적 기업과 기업 전반이 강화되면서 노동으로 먹고사는 대중의 정치적 중요성은 약화될 수밖에 없다.

경제적 세계화의 차원은 정치적 차원의 메커니즘도 규명해 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현재 이명박 정부가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로 인식되던 공공 서비스인 교육, 의료, 보건, 미디어, 에너지 분야 그리고 심지어 먹는 물까지 급속하게 이윤과 사업의 영역으로 재편하려고 하는 것은 명백히 포스트민주주의 정치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이러한 의사결정 구조는 국민의 보편적 요구보다는 기업 엘리트의 특수한 이해관계를 더 효과적으로 관철시키고 있다.

"기업의 지배력을 제어하고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라"

그렇다면 비민주주의적 관행에 익숙해 있으면서 동시에 지구적 신자유주의의 경쟁논리로 무장된 강력하고 광범위한 기업 권력과 경제 권력을 대면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정치가 기업지배의 ‘미끄러운 경사길’로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떤 실천이 필요할까? 그 점에서 콜린 크라우치가 제안하는 실천 강령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첫째, 정부에 대한 기업의 압도적 지배력을 제어하라. 정부란 본질적으로 무능하고 오직 기업만이 역량이 있다고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는, 공공사업에 대한 통제권을 기업에다 넘겨주고, 정부는 능력과 자신감을 상실하고 부패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보편적 시민권이 살아 있는 민주주의 사회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야 한다. 예를 들면, 정당과 정치 고문이 기업 로비스트 집단 간의 자금과 인사이동을 금지하거나 규제하는 제도, 공무원들이 기업의 정치 자금 기부자들과 명확하게 구별되고, 기업의 영향력이 차단된 상태에서 재정 지출과 정책 결정을 하는 제도를 법제화하는 것 등이 있다.

둘째, 시민이여, 정당을 활용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조직하라. 포스트민주주의를 극복하고 민주주의를 질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 시민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먼저 정당을 통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뿐만 아니라, 정당 밖에서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사회 운동 단체에 힘을 보태면서 정당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만일 정당을 버리고 사회 운동을 택하는 것은 포스트민주주의의 승리를 더욱 심화시킬 뿐이며, 그럴 경우 사회 운동 단체의 압력을 받지 않는 정당은 기업 로비의 세계에 계속 머무르게 될 것이고, 강력한 정당을 건설하지 않고서 행동하려는 운동은 기업 로비에 의해 짜부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집단과 조직을 구성해서 함께 집단적인 정체성을 발전시키고 그 정체성에 따른 이해관계를 인식하며 자율적으로 그 이해관계에 기초한 요구를 조직화된 형태로 표명하는 민중으로서 적극적 시민권이 보장되는 평등주의적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정당을 통해’, ‘비판적으로’, ‘조건부’로 실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새해에도 소의 걸음처럼 비록 시작은 느리더라도 중단 없이 천천히 오직 한 길로 뚜벅 뚜벅 걸어갈 일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기 때문이다.

 

 

 

[이재성 칼럼 4]
이재성 / 계명대 교양학부 철학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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