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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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철거민.미네르바...우리 안의 타자일 뿐인가"

소외된 소수의 사람들

2009년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구 한강로 3가 63-70번지 국제빌딩 제4구역에서는 ‘우리 안의 홀로코스트’가 빚어졌다. ‘도시환경정비사업’이란 이름의 용산 역세권 개발 사업이 벌어지는 장소다. 재개발 추진 과정에서의 ‘속도전’에 따라 철거민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로 인해 용산 4구역 건물 옥상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던 철거민에 대한 경찰의 무리한 과잉 진압은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숨지는 참혹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정부의 개발정책과 계획으로부터 소외된 소수의 사람들, 그들 사이에 가로놓인 단절과 분노의 당사자들, 최소한의 생존권을 요구하며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철거민들에게 공권력은 경찰특공대로 대응했고 물대포를 이용해 강제진압을 강행했다. 이명박 정권과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경찰은 갈등의 조정자라기보다는 ‘국민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고’, ‘떼쓰는 자들에게는 본때’를 보이는 식의 공권력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철거민들의 생존권 투쟁은 단순히 무리지어 떼쓰는 철없는 행동이었고,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도시 테러일 뿐이었다.

만행

우리 안에서도 홀로코스트(Holocaust)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강압적 일제고사 시행에 반대하는 교사들을 해임했고, 정부 정책에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다는 이유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구속했으며, 최소한의 생존권을 주장하며 저항하는 철거민들을 경찰특공대를 투입해 토끼몰이식으로 진압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사태는 분명 정치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정신병리학의 차원이다. 이 정권은 회복불가능한 환자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이런 일은 이제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해주는 내면의 소리, 초자아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오로지 강력한 권력이라는 이드만 존재한다.

반세기전 히틀러의 나치도 그랬다. 그들은 권력의 강화를 위한 외부의 적이 필요했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독자적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상호 긴밀하게 조율되는 정부, 군대, 당, 기업의 관료제적 복합체가 함께 연동해서 저지른 참극이었다. 정부는 파괴 과정의 초기 단계에서 나치의 반유대적 법령을 생산했고, 유대인의 개념을 정의하고 그들의 재산을 강탈했으며 유대인 게토화를 실시했다. 군대는 학살작전의 전개와 학살수용소로의 유대인 이송을 담당했으며, 나치당은 독일인과 유대인 간의 복잡한 관계와 관련한 모든 문제에 개입했고, 기업은 유대인 재산의 강탈과 강제노동, 가스학살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마디로 홀로코스트는 이러한 포괄적인 행정기계의 산물이었다.

'욕망충족'의 자아 몰두


홀로코스트가 자행되던 당시 그 많던 유대인의 이웃들은 다 어디에 있었으며, 침묵했는가? 해답은 당시 거의 모든 유럽인들에게서 나타난 ‘자아 몰두’에서 찾을 수 있다. 파블로 피카소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고, 장 폴 사르트르는 극본을 썼다. 이렇게 대다수 유럽인들은 유대인과 동일한 운명을 공유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면서 홀로코스트에 하나의 온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홀로코스트의 끝없는 진상규명이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도 인간의 도덕과 이성을 올바로 세우고 인류의 역사를 바로 쓰기 위해서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안에서 철거민들은 마치 유대인들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라져야 할 귀찮은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20년이 넘도록 소리치고 외쳤지만 우리 안에서 그들은 유령이 되어버린 것이다. 철거 현장에서 철거민들과 함께 경찰과 용역깡패들에게 용감하게 맞서 싸웠던 한 시절의 운동세대들도 지금은 뉴타운 개발이익의 욕망구조에 기꺼이 편승하고 있다. 용산의 철거민들이 던진 화염병과 새총은 그들이 ‘없는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실재’하는 존재임을 주장하는 외침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외침에 귀를 막고 자신들의 욕망충족이라는 자아 몰두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우리 안의 타자일 뿐인가.

촛불이 꺼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

소수의 희생을 전제한 개발정책, 가진 사람을 우선하는 강경일변도 성장정책, 사회적 위기에 대한 문제해결 능력의 부재, 과격하고 과장되게 표출되는 갈등에만 반응하는 사회통합체계, 정치적 나침반을 잃어버린 국회의 모습, 자율성과 스스로 책임 있는 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권력의 눈치만 살피는 경찰과 검찰이 우리 사회에서 계속되는 한 우리 안의 홀로코스트는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용산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을 계속해야 한다.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의 인간적 권리와 도덕적 가치를 올바로 세우고 역사에 똑바로 기록하기 위해서라도.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이 우리 안의 타자가 아니라 바로 나임을, 용산사태는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임을 확인해야 한다. 촛불이 꺼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이재성 칼럼 5]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과정부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기획조정실장.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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