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당함과 뻔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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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 칼럼]..."죄책감 느끼는 기본 자체가 없는 것 아닌가"

연쇄살인범 이야기로 연일 매스컴이 떠들썩하다. 한동안 잠자고 있던 사형제를 다시 끄집어내자는 소리가 높아지는가 하면, 사이코패스 유형의 범죄 증가에 대한 걱정 어린 관심도 커지고 있다. 무엇보다 힘없는 여인들의 목숨이 개인의 순간적 쾌락을 위해 허망하게 희생되었다는 점 때문에 힘없는 시민들의 안타까움과 분노가 각별한 듯하다.

힘없는 사람들을 제물로 삼는 짓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의 범죄요령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용산참사의 희생자들 역시 힘없다는 이유로 개발이익의 신디케이트 앞에서 무참히 스러졌다. 정부는 특공대를 동원해 힘없는 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아놓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으려하고 있다. 책임 있는 누구도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았다. 현 정부에는 죄책감을 느끼는 인간의 기본능력 자체가 없는 것 아닌지 의구심이 엄습한다. 이 사이코패스 상황 앞에서 힘없는 시민들이 공분하고 불안해하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한나라당 ‘마우스 탱크’의 선봉에 서왔던 한 의원이 민주당을 향해 사이코패스 정당이라는 독설을 퍼부었다가 오히려 그 본인이 사이코패스 아니냐는 역공을 당하기도 했다. 실재와 자의식이 얼마나 동떨어질 수 있는지를 새삼 확인시켜 주는 사례다. 이 해프닝을 보며 뻔뻔함과 당당함을 구분할 필요를 느낀다.

우리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적을 효과적으로 용감하게, 즉 잔인하게 섬멸하고 죄책감이 아닌 자긍심을 느낀다고 해서 뻔뻔한 사이코패스라고 욕하지 않는다. 일제 지배자들의 눈에는 안중근 의사나 김구 선생이 테러리스트일 뿐이겠지만, 우리는 그분들의 당당함을 뻔뻔함과 혼동하지 않는다. 그 당당함이 ‘애국’이나 ‘정의’ 혹은 ‘희생’처럼 장기간에 걸쳐 범사회적으로 체계화된 가치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 쾌락을 위해 남의 생명까지 희생시키려 드는 연쇄살인범의 심보에 동의할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그의 태연한 모습은 시민들의 분노를 자극할 뿐 어떤 공감도 얻기 어렵다. 하지만 특정 집단의 이익 때문에 약자들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생각에 동의할 사람은 별로 없다고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 있게 단정할 수 있을까.

그 동안 우리 사회를 휩쓸어온 성장과 경쟁의 회오리를 생각하건대, 또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고 남보다 한 발 앞서려면 옆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고 악써온 범사회적 강박증을 떠올리건대,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단정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자신에게 직접 관련되지만 않으면 타인의 희생과 고통에 대해 무감각해지는 것이, 어찌 보면 사이코패스 기질을 단련하는 것이, 생존의 비법처럼 되어 버린 지 오래 아닌가. 공존과 공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은 ‘좌빨들’의 한심한 몽상 내지 오만한 불온사상 취급 받기 일쑤 아닌가.

용산참사에 대한 정부의 ‘뻔뻔한’ 대응 뒤에는 꽤 광범한 이 사회적 신념 및 반응체계가 버티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어느 못된 개개인들의 뒤틀리고 억눌린 심리구조에 환원되지 않는다. 약자를 배려하고 다함께 잘 살자는 마음이 우리 사회를 당당히 주도해왔다면, 생존권을 지키겠다는 시민들을 상대로 정부가 특공작전을 벌이는 일은 없었을 테고, 뻔뻔하게도 원통한 죽음의 책임마저 힘없는 철거민들에게 떠넘기려 ‘검거’와 ‘검증’의 무기를 총동원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뻔뻔함’ 뒤에 우리의 공범관계가 있음을 자각한다고 해서, 그 뻔뻔함이 당당함으로 바뀌거나 정부의 죄책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반성은 우리 자신과 더불어 향후의 정치 지형을 바꿔갈 힘일 뿐이다. 범죄의 전말에 대한 인식의 가장 큰 의의는 용서가 아니라 재발 방지에 있다. 반면에 정부의 책임전가는 제2, 제3의 용산참사를 기획하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살인을 하고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상대가 화해할 수 없는 적, 민족의 적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부의 특공작전이 당당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으려면, 그 상대가 섬멸되어 마땅한 반민족적 반인륜적 적대세력이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생존권을 위해 절망과 싸우는 철거민들은 결코 정부의 적이 아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철거민들을 기어이 적으로 삼는다면, 앞으로 너무 많은 적들과 싸워야 할 것이다. 어디까지 가는지 눈여겨볼 참이다.

 

 

[홍승용 칼럼 42]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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