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민주.개혁세력의 길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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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국 칼럼] "처절한 자기반성, 그리고 서둘러 머리를 맞대라"


 사방을 두루 살펴보아도 꽉 막혀 있다.
 치고 나갈 틈새도 보이질 않고
 물러 설 수 있는 퇴로를 찾기도 어렵다.
 먹빛 같은 어둠 속에
 바람소리조차 아득한 정적 속에
 꼼짝 할 수 없이 갇혀 있는데
 간간히 귓전을 때리는 함성소리가
 온 몸에 소름이 돋게 만든다.

 손바닥에는 땀이 흥건하고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흐른다
 입술은 바짝바짝 타 들어가고
 한 순간 흐드득 쏟아지고 마는
 소낙비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란다.

 초조하다. 불안하다.
 한없는 두려움에 몸을 뜬다.
 쉬 잠들지 못하는 밤이 점점 많아진다.
 불면의 밤이 동이 터 오를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한없이... 한없이...
 길고도 길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저 오늘을 버텨 내일을 연명할 수단을 찾는 것 뿐
 꿈도, 이상도, 미래도 없다
 앞이 보이질 않으니
 자신의 운명을 일치감치 예감한
 병자처럼
 점점 말이 거칠어지고
 염치가 없어지고, 짜증이 늘어나고, 난폭해지고, 
 특정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분노만 쌓여가고 
 눈에는 광기가 번들거린다

 인간이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품위와
 교양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다.
 손에 잡히는 것, 발에 걸리는 것
 무엇이든 휘두르고, 걷어차고, 내동댕이질 친다.

 "자신의 이상에 이르는 길을 발견할 수 없는 사람은, 이상을 지니지 않은 인간보다도
   더 경박하고 파렴치하게 살아간다" (니체)



길거리 야당, 여당 안의 야당

 지금 이 땅에서 이처럼 공포에 떨면서 “경박하고 파렴치하게” 살아가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바로 청와대와 청와대에서 드리워 놓은 줄을 잡고 있거나 청와대에서 내던져준 개목걸이에 목을 매달고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은 희미한 촛불도 아니고 문약(文弱)한 사람들이 모여 읽는 시국선언문도 아니다. 그들을 두려움에 휩싸인 채로 불면의 밤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한 순간도 쉬지않고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계소리가 그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고문과도 같을 것이다. 금새 1년 반이 훌쩍 지났고, 이제 남은 시간은 겨우 3년 반 남짓... 경찰과 검찰의 강철대오로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간’이다. 정치적 반사이득을 노리기 위해 전직 대통령을 조잡한 방법으로 할퀴고 물어뜯어 결국에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또는 “포괄적”살인(?)까지 하였으나 그래도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과거청산을 위한 훌륭한(?) 선례까지 만들어 놓은 정권인만큼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주어진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대한 권력의 두려움을 배가시키는 것은 당연히 강력한 야당의 존재다. 그러나 우리 정치의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우리 정치지형에서 가장 강력한 야당은 국회나 길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여당 안에 있다. 한 정치인의 이름을 따고 그 정치인의 치마폭에 둘레둘레 모여있는 일군의 정치세력들... 어떤 눈치도 보지 않는 현 권력층이 유일하게 눈치를 살피는 정치세력이다. 그들은 그 어떤 이유로도 흔들리지 않는 콘크리트 지지층까지 확보하고 있다.

"대구에서 심판.응징?...동굴 속에서 떠드는 소리"

 단임제 체제에서 대통령과 여당의 정치인들은 운명공동체가 아니다. 대통령의 인기가 끝없이 추락하여 여당 국회의원들의 입지마저 흔들리게 되면 청와대와 여당의 거리는 점점 벌어질 것이다. 이 때 기회를 엿보던 여당내 야당의 야성(野性)이 날개를 펼치고, <조중동>과 <KBS>까지 ‘연대’하여 떠들어대기 시작하면 찬밥먹던 진짜 야당들은 쉰밥 신세로 전락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흩어져 있는 힘을 모으지 않는 이상은 여당내의 야당을 넘어 설 수 없는 것이 현재 실질적인 야당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선거가 거듭될수록 한나라당의 절대지지층은 정책투표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 정책이란 게 기껏해야 내 집값, 내 땅값 올려주고, 내 세금 깎아 주는 게 고작이긴 하지만... 그래서  후보의 ‘자질’이나 ‘품성’, ‘경력’ 또는 ‘심판’이니 ‘응징’이니 하는 구호는 한나라당의 절대지지층에게는 아무런 변수가 되질 못한다. 

 지금 야당들의 존재감이 보이지 않는 제일 큰 이유는 현정권의 정책을 저지하거나 보완한 정책을 다듬어 내 놓은 ‘상품’은 없이, ‘심판이니 ‘응징’이니 하는 구호만 요란하기 때문이다. 특히 대구지역에서 ‘심판’. ‘응징’이라는 구호는 동굴 속에서 이불 뒤집어쓰고 떠드는 소리와도 같다.

"연대는 절체절명의 과제...먼저 자신부터 반성해야"

  대구지역에서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민주.진보.개혁을 지향하는 정치세력과 시민사회단체의 연대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절체절명의 과제다. 문제는 연대의 방식이고 연대의 전제조건이 있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 연대의 전제조건에서 과거의 행적에 대한 ‘반성’과 ‘성찰’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그 반성과 성찰의 우선순위는 제일 먼저 자신과 자기조직에 대한 반성이어야 하지 타자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우선되어서는 곤란하다.

 연대를 주장하면서도 “싹쓸이만 막자”는 거지동냥식의 선거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민주당, “동지는 간 데 없”는데 빗바랜 깃발만 부여잡고 있는 진보정당들, “시민없는 시민운동”을 해온 시민단체가 한 자리에 계속 모이기 위해서는 자신과 자신의 조직에 대한 처절하고도 잔인하기까지한 자기반성이 있어야 한다.  

 참여정부의 실패로, 그리고 현 정부의 일방적 독주체제로 87년 체제의 성과까지 부정하며 절망할 필요는 없다. 87년 체제는 한국사회에서 ‘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게 한 항쟁의 성과물이요 시민사회의 합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어김없이 선거가 돌아오도록 만들어 둔 것이 87년 체제다, 그래서 권력층은 시간이 지나는 것이 두려울 것이고, 국민들은 시간이 어서 흘러 선거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린다.

"대구, '선거'를 위한 연대여야 한다"


 그런데 87년 이후 유독 대구지역만 선거가 무의미한, 요식절차에 불과한 독특한 지역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대구를 바꿀 수 있는 동기와 힘을 얻는 방식은 싫든 좋든 선거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시민사회단체와 진보개혁 정치세력의 연대가 대구사회의 변화를 겨냥한 것이라면 ‘선거’를 위한 연대여야 한다. 그런데도 “선거만을 위한 연대”를 하지 않겠다면 무엇을 위한 어떤 연대를 하겠다는 것인지 구체적인 설명이 있어야 한다.

 “자기 이상에 이르는 길을 찾”지 못해 “경박하고 파렴치하게 사는” 것은 꼭 수구보수세력에게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혼자서 길을 찾지 못하면 같이 찾으면 된다. 같이 길을 찾기 위해서는 ‘실천가능한 공동의  전략’과 ‘획득가능한 공동의 목표’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 만나야 한다. 시간은 우리 편에 있지만 우리가 충분히 준비할 만큼 시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다. 갈길은 먼 데 해 저물면 길을 잃는다. 서둘러 머리를 맞대라.






[김진국 칼럼 24]
김진국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의사. 신경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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