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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를 기다리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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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의 경제읽기]
"지역의 총체적 몰락, 중앙정치와 한바탕 전면전을 준비하는 것은 어떤가"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에 따른 엄청난 추모 열기와 소통의 방법을 모르는 이명박 대통령의 헛삽질에 대해서 나는 거의 동질의 감정의 흐름을 느낀다. 그것은 분노이기는 하지만 자학성이 강하고, 배반이라고 하기에는 스스로 한없이 서러워지는 그런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노무현 전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그러한 감정이 같은 뿌리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뭐랄까, 서울서 전학 온 여학생의 꽁무니를 모두가 졸졸 쫓아다니고 있는 사이에 어린 누이가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혼자 쪼그리고 앉아 느끼게 되는 그 가슴 휑한 기분. 대한문과 청와대 사이를 오가며 민심이 들끓고 있는 와중에 지역의 총체적 몰락이 진행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대한민국의 심상(心象) 지도에서 지역이 사라지고 없다. 이제 지역민에게조차 지역은 소외되고 있다. 지역 신문과 방송에서 지역발 뉴스가 얼마나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는지를 눈치 채고 있는가. 그 빈자리를 4대강 사업이 마치 점령군처럼 메우고 있다.

지역의 총체적 몰락은 한 때 잠잠해진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지역에 쓰나미처럼 밀어닥치는 상황과 관련이 있다. 노무현 전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 사회에 메시아를 불러들이는 마법의 진원지이다. 노무현은 우리사회에 한 때 강림하였으나 모질게 내 쫓아버린 버림받은 메시아로 재림하고 있다. MB는 스스로 메시아임을 자임하고 있으나 몇몇 되지 않는 신도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그들만의 소통을 하고 있다. 이들 메시아가 지역을 불임의 땅으로 만들고 있다.

그런데 지역 사람에 있어 이들 메시아는 부조리의 메시아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은 국토균형개발론을 국정의 최고목표로 체화시킨 인물이 아니던가. 그러나 대한문 앞에서 추도되는 노무현은 더 이상 국토균형개발론자가 아니다. 대한문 앞의 서울 사람들은 약속한 금기처럼 국토균형개발론에 대해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다. 국토균형개발론이 사상된 노무현은 허구이다. 대한문에서 재림한 메시아 노무현은 서울사람들이 추구하는 가공된 메시아일 따름이다. 그 배반의 메시아에 대하여 지역 사람들 그 누구도 분노하지 않는 현실에 기가 막힌다.   
 
한편에서는, 수십조원의 예산을 양손에 들고 4대강이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MB라는 메시아가 지역에 출몰하고 있다. MB는 역린을 건드리는 메시아이다. 용의 목 아래에는 직경 한 자쯤 되는 역린의 비늘이 있다. 다른 비늘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 있는 역린을 건드리면 용은 반드시 사람을 죽인다. 4대강은 지역의 역린이다. 지역은 사람이 살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다. 지역이라는 구체성을 지우고 4대강이라는 추상적 대상을 앞세워 지역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 MB 메시아의 본령이다. 지역의 내발적 발전 전략 방식은 4대강의 주문을 외우기만 하면 마구 뿌려지는 예산에 의해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MB 메시아의 깃발 아래 돈과 권력의 유혹에 굴복하여 구체적인 지역의 삶의 현장을 방기하는 자학적 태도가 지역에서 마치 식민지에서인양 도지고 있다.

이제 지역에서 더 이상 메시아를 기다리지 마라.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처럼 기다려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지역민이 주체가 되어 발휘되는 내발적 역량만이 지역을 되살릴 수 있다는 각성이 필요하다. 지역 바깥에서 지역을 구원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구하기보다는 스스로가 구원의 주체이며 대상임을 직시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 주위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성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에 평화뉴스가 중심이 되어 진행한 시국토론회와 연이어 계속된 논의가 우리의 현실을 반영해 주고 있다. 시국토론회는 내년 지방선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초점이 맞추어져 진행되었다. 토론은 진지했지만 여전히 상호간 넘나들 수 없는 두꺼운 벽만 확인하는 것으로 끝났다. 지방선거에서의 거듭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다른 대안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이 출구없는 현실. 새로운 문법에 의거한 논의 방식이 필요하다. 지역의 총체적 몰락과 붕괴하는 지역민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텍스트로 삼으면 지방정치의 새로운 돌파구가 열리지 않을까? 그곳에 당의 강령이 어떻고, 이념이 어떻고 따위의 무슨 긴 말이 필요할까? 지방선거를 패배의 역사적 표식으로 물려받을 것이 아니라 승리의 기회로 포착하는 용기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케케묵은 담론은 될 수 있는 한 무시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아예 이참에 지방정치와 시민운동의 경계를 없애버리는 선언을 하는 것은 어떨까? 나아가 내년 지방선거에서 시민운동가의 총동원령을 내려서 중앙정치의 하수인과 한바탕 전면전을 준비하는 것은 또한 어떨까?

시민운동가가 지방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지역의 정치적 관행을 혁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경제적 영역에서 시민운동의 개입방식이 있다. 그것은 사회적 경제의 구축에 뛰어드는 일이다. 사회적 경제는 지역공동체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지역공동체에 새로운 방식의 경제적 순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 사회적 경제이다. 사회적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를 뛰어넘는 대안을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새로운 사회적 서비스 영역을 개척하여 사회적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방법이 될 수 있다. 지역에서 로컬 푸드의 확산을 통해 도농간의 협력 모델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에 시민운동의 역량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각종의 협동조합 운동을 지역에 활성화시키는 것도 새로운 시도로 주목할 만하다. 

지역에서 확산되는 메시아론을 경계해야 한다. 지역이 바라보고 숭배할 외부의 메시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역내부에서 지역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 이를 위해 내년의 지방선거를 중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역의 사회적 경제 기반 구축에 지역 전체의 관심이 보다 확산되어야 한다. 지역공동체의 재구성을 통해서만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다.

 

 

 

[김영철의 경제읽기 21]
김영철(계명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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