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의 49재와 유골 안장식이 지난 10일 김해 봉화산 정토원에서 열렸다. 시대의 격랑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아온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랐던 고향 산기슭에서 영원한 안식을 구했다. 추모 동영상 모음집과 참여정부 5년 등 두 종류 8장의 DVD가 그와 함께 했고,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는 소박한 유언에 따라 가로 2m, 세로 2.5m, 높이 40㎝의 비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을 법한 희망은 함께 묻히지 못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반칙과 특권이 통하지 않는 세상, 평화가 넘치는 세상은 순식간에 벼랑으로 내몰리는 민생, 역주행하는 민주주의, 파국에 직면한 남북 관계라는 절망과 분노로 되돌아오고 있다. 희망은 절망이 되어 고스란히 살아남은 우리들의 몫이 되었다.
되돌아보면, 노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49일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사회현상을 낳았다. 마치 ‘바보 노무현’의 부활이라 할 만 했다. 국민장 기간 동안 무려 500만여명이 넘는 조문 행렬이 줄을 이었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복원, 소통 부재의 해소 등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해 근본적 변화를 촉구하는 사회 각계각층의 시국선언도 있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정부와 여당의 태도와 자세에는 어떤 미동도 없다.
불통(不通)의 시대...어떻게 소통할까?
오히려 국민을 비웃기라도 하듯 공안정치의 강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치고 있으며, 부자감세로 바닥난 국가 재정을 위해 서민의 호주머니를 터는 ‘죄악세’를 모색 중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신분 고착화에 매달리고 있으며, 국민 여론을 무시한 채 재벌과 친여 언론에 방송을 떠안기는 미디어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한마디로 불도저식 밀어붙이기가 낳은 불통(不通)의 시대다.
그러니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다. 정부와 여당의 이런 강고한 벽에 직면한 민주개혁세력은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중요한 것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다. 무엇을 해야 하는 지는 대부분 쉽게 합의할 수 있다. 우리가 희망하는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 반칙과 특권이 통하지 않는 세상, 평화가 넘치는 세상은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의 회복과 사회적 양극화의 철폐라는 목적을 실현할 때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할 것인지는 아직도 뜨거운 논쟁거리이다. 상황이 이렇고 보니 민주개혁세력들의 어깨는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상대는 과거처럼 무지하지도 무분별하지도 않다. 절망과 분노가 깊을수록 이를 희망으로 전환시키려는 노력이 더욱 치밀하고 세심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혹시라도 그동안의 추모열기에 편승하거나 반사이익에 안주하려는 얄팍한 태도를 견지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버릴 일이다.
필자는 지금 여기서 민주개혁세력에게 주어진 무거운 과제야 말로 바로 어떻게 ‘소통’하고 ‘연대’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목적이 아니라 방법의 문제라는 말이다. 소통과 연대는 방법론적으로 우열이 없는 상보적 개념이다. 먼저 우리가 이해하는 ‘소통’이란 ‘타자가 처한 상황, 그 상황에 대한 입장, 그 상황과 입장에서 원하는 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전제할 때 가능하다.
사람은 같은 상황에 처하더라도 입장이 다를 수 있고, 입장이 같더라도 원하는 것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이런 점을 무시하고 상황이나 입장만을 고려한다면 소통에 많은 어려움이 발생한다. 그래서 의사소통한다는 것은 서로 마음먹은 정보를 교환하는 행위로서 언어로 전달되는 내용뿐만 아니라 몸짓, 신체언어, 음색, 자세, 침묵까지도 포함하는 행위를 말한다.
소통과 연대...저항의 표현을 사회 전체로 연결하려면?
소통이 된다는 것은 서로 마음이 잘 통한다는 것이며, 나의 의사가 상대방에게 잘 전달된다는 말이다.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은 내 말이 상대방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으로서 서로 마음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은 사적인 차원에서의 의사표현, 전달, 심정적 공감을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소통에는 사적 영역이외에 공적 영역이 존재한다. 철학자 하버마스는 이러한 소통을 ‘합리적 기준에 입각한 언어교환행위’라고 말한다. 이 합리성은 사적인 심정 전달의 장소를 공론의 공간이 되게 한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바로 이런 소통의 합리성이 제대로 작용하는 사회다. 이 소통의 합리성이 제대로 실현된 제도적 장치가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를 공식적으로 매개하는 것은 정당, 의회, 선거와 같은 제도들이다. 그러나 합리적 소통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할 경우 모든 제도는 추상적인 체계로 고착화되는 경향이 있다. 이때 인간적 삶의 구체적인 내용은 사라지게 되고, 바로 거기서 저항이 일어나게 된다. 소통 불능의 폐색 상황으로 내몰릴 때 결국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소중한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통 불능을 제어하기 위한 저항의 몸짓을 할 수 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저항의 표현을 우리 사회의 체제 전체에 연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소중한 삶의 문법에 맞는 사회 체제의 건설에 기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근본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문법에 부합하는 사회 체제, 즉 자유롭고 평등한 주체들이 다양한 수단을 통해 공개적으로 대화하고 토론하여, 다양한 가치들을 공공복리로서 주장하고 합의하고 나아가 실현하는 시민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필자는 그 두 번째의 방법을 ‘연대’라고 생각한다. 연대(Solidaritè̀)는 원래 공동체의 책임 혹은 공통의 의무나 보증을 의미했던 로마법의 전문 용어가 ‘연대 보증’을 의미하는 프랑스 법으로 바뀐 것에서 유래한다. 말하자면 둘 이상의 다수자가 계약을 한 경우 한쪽이 다른 쪽에게 또는 각자가 모두에게 책임을 져야 할 때 그것을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러한 연대의 의미는 한 사회에서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방식에 비례해 왔고, 초창기 프랑스 혁명의 형제애에서 출발해서 오늘날 기계적 연대, 노동자 연대, 사회적 연대, 그리고 유기적 연대 등으로 이행해 왔다.
궁극적 연대의 대상은 누구인가?
한국사회에서 민주개혁세력은 자주 연대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민주개혁세력이 연대해야 할 대상은 과연 누구인가? 노동자? 농민? 학생? 시민사회단체? 지금까지 우리사회에서 민주개혁세력은 연대를 주장하고 구성할 때 연대의 대상을 자신들과 현장에서 함께 투쟁할 대상들만 고려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정치적 상황이나 사회적 갈등의 긴박성에 따라 고려의 중요성이 달라질 수도 있으나 그런 연대는 일회성 행사일 뿐이다. 만일 민주개혁세력이 여전히 그런 동종교배에 근거한 이벤트성 연대를 고집한다면 그 연대는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
민주개혁세력의 궁극적인 연대의 대상은 동일한 희망과 동일한 뜻을 가진 소통의 집단이나 개인이 아니다. 조금 다른 생각과 조금 다른 뜻을 가진 집단이나 개인이다. 소통의 부재는 이 미세한 차이에 대한 상상력 부족에서 온다. 특히, 생활세계의 개인화와 다원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연대는 저 미세한 차이의 이해관계를 일치시키고 조정할 수 있는 소통방식의 기반 하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연대는 민주개혁세력이 내세우는 금과옥조인 ‘도덕성’과 ‘당위성’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결코 도덕과 당위의 결과물이 아니다. 도덕과 당위를 내세워 연대하자는 것은 아주 순진하고 무모한 생각이거나 아니면 기만적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연대는 이해관계자들 간의 분업화, 즉 역할분담을 통한 이해관계의 조정이라는 대원칙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필자는 혹여 우리사회의 민주개혁세력이 도덕성, 이념, 당파성, 진영 등을 고집하면서 동종교배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불임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며, 그 결과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가치를 생산할 수 없다. 따라서 민주개혁세력은 더 강한 연대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라도 시민사회 내부의 노동 분업을 도덕적 능력의 교육과 일치할 수 있도록 소통하고 연대하는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적어도 우리사회의 사회적 관계의 형식 변화가 급진적인만큼 연대의 구조 변화 역시 전통적 형식을 벗어나 덜 강제적이면서 다면적이고, 느슨한 것을 더 촘촘하게, 그리고 일상적이고 유동적인 연대의 틀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민주개혁세력은 대중들에게 반대와 비판만 하는 세력이 아니라 이해관계의 조정자로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 내는 생산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성 칼럼 10]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과정부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실장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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