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에 살고 있는 20, 30대는 “폐허세대”다. 시민경제사회연구소 홍헌호 연구위원이 지난 11월 6일자 프레시안 칼럼에서 사용했던 용어다. 섬뜩하면서도 끔찍한 말이다. 자연재해가 남긴 상처 아니면 원자폭탄의 흔적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공포를 느끼게 한다. 가뜩이나 ‘88만원 세대’ 규정도 공포스러운 마당에 아직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할 날이 많은 그들에게 폐허세대라니. 이 정도 언어 선택이라면 당사자들에겐 공포를 넘어 절망이다. 절망이 깊어지면 궁극에 다다르는 곳은 죽음 아닌가? 그럼에도 필자는 ‘폐허세대’라는 용어에서 죽임을 느낀다. 인간적 ‘죽음’이 아니라 사물적 ‘죽임’을 말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홍위원의 의도는 분명하다. 한국 사회가 처한 지금의 위기 상황에 파열음을 내기 위해서다. 지금의 20, 30대가 40대-60대가 되어 사회의 중심축이 될 2035-2050년에는 경제성장률이 1%대로 떨어지고 일자리 증가율이 0%로 근접하는 어이없는 상황이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예측에 구멍을 내자는 것이다. 아마도 경제성장률 1%대, 일자리 증가율 0%의 상황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우리 사회가 경험할 공포는 넘쳐나는 노숙자, 유괴나 납치와 같은 극단적인 범죄가 횡행하는 생존권 투쟁의 각축장 이외에 무엇일까.
용산참사(주거권)와 쌍용자동차 사태(노동권), 사교육비 폭등(교육권)과 같은 ‘사회권의 역행’은 끔찍한 위기의 징후들이다. 이 사실의 문제들은 실존적으로도 이미 우리 주변의 수많은 죽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미리 경고음을 울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폐허’가 낳게 될 죽임에 대한 전망을 적극적으로 하라는 주문 같은 것.
요제프 K의 죽음과 '사회권의 역행'
카프카의 소설 『심판』에서는 한 은행의 은행원으로 일상에 매몰되어 살아가는 주인공 요제프 K가 등장한다. 그는 30살 생일이 되는 어느 날 아침 ‘알 수 없는’ 기관에 죄명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체포되어 자신을 방어하려고 고군분투 노력하지만 결국 아무 보람도 없이 31살 생일을 맞는 전날 밤 역시 ‘알 수 없는’ 남자들에게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죽임을 당하는 순간 그의 몸은, 생태정치학적으로 표현하면, 회로에 따라 작동하는 영토화, 코드화, 식민화된 몸일 뿐이다. K의 몸은 자신의 본래적인 삶과는 아무런 관련 없이 “개 같은!”이라는 외마디 외침만 남기고 사라진다. 그는 스스로 죽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구조 혹은 제도에 의해 사라진다. 그의 죽음은 결코 주체적인 죽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요제프 K의 죽음은 철학자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사라진 것이지(verenden) 죽지(sterben)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사물(혹은 동물)이었던 셈이다. 그의 죽음이 사물의 죽음, 동물의 죽음, 즉 ‘개죽음’이었던 이유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좋은 죽음도, 멋진 사망도, 숭고한 서거도 아니었다. K의 개죽음은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용산참사에서, 쌍용자동차 사태에서, 그리고 사교육비 폭등에서 많은 사람들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사회의 ‘사회권의 역행’이 배설한 이런 상황을 애써 외면하면서 단순한 ‘세상사람’(das Man)으로 살아갈 뿐이다. 그들의 죽음을 요제프 K와 같은 개죽음으로 내몰기라도 하듯이.
우리 사회 한 복판에 서 있는 20,30대
요제프 K는 하이데거의 언어로 ‘세상사람’에로 탈출을 시도하는 ‘죽음을 향한 존재’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서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의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죽음 앞에서 도피하는 세상사람의 태도’와 ‘죽음을 앞질러가는 본래적 실존의 태도’이다. 전자가 비본래적인 인간이라면 후자는 본래적인 인간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일상을 쉽고 편하게, 대충대충 고민 없이,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일상적 인간을 비본래적인 인간, 즉 세상사람이라 부르며, 현실을 깊게 고민하고, 철저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을 본래적인 인간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지만, ‘아직 아님’이라는 시간의 지평 안에서 불안한 삶을 영위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인간은 죽어야할 운명의 주체를 슬그머니 바꿔치기한다. 나의 죽음이 아니라 세상사람의 죽음으로. 그러나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이치의 죽음』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반 일리이치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세상사람으로 도피했지만, 자신의 죽음 앞에서는 다시 세상사람에서 빠져나온다.
일리이치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용기 있게 받아들이면서 그 안에서 개시되는 인간의 본래적인 가능성을 떠맡음으로서 지금까지의 자신의 삶이 기만적이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때 죽음에 대한 그의 불안은 이제 세계와 존재자들이 충만한 의미와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기쁨’이라는 기분으로 전환된다. 그의 죽음은 세상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가능하게 한다.
죽음은 인간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이며 다른 가능성으로 능가할 수 없는 가능성으로서 그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유일한 존재로서의 나의 죽음일 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성에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지금의 20, 30대에게 ‘폐허’는 요제프 K의 죽음을 예시한다. 아니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지은 죄 없이, 요제프 K처럼 살다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
역행하는 '사회권'에 대해 물어야 하는 이유
사실 우리는 마치 개처럼 평생 목에 사슬을 매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러한 구속은 인간의 탄생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역설적이지만, 인간은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 점에서 존재 그 자체는 이미 구속이다. 하지만 그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이행, 즉 인간적 죽음을 가능하게 하는 것도 역시 인간이다. 이반 일리이치처럼.
죽음이 멀리 있고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느껴질 때에 우리의 삶은 이미 게을러져 있다. 하지만 언제라도 죽음과 대면하리라는 것을 느낄 때 인간은 보다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다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삶은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소중한 ‘선물’이다. 이처럼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언젠가 사라질 수 있는 자신의 삶에 대해 소중한 ‘의미’를 부여할 때 제대로 드러나며 그때서야 비로소 죽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적으로 ‘죽는 것’이 된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고 그 의미를 묻는 자들이다.
나의 존재 의미를 묻는 자들은 너의 존재 의미에 대해서도 물을 수 있다. 이때의 나와 너는 타인을 구속하는 사르트르의 ‘타인의 지옥’이 아니라 각자의 존재 의미를 묻고 있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본래적인 실존으로서의 인간들이다. 그런 나와 너로서의 우리가 역행하는 ‘사회권’에 대해 물어야 하는 분명한 이유는 ‘폐허세대’라 불리는 20, 30대의 존재 의미를 밝히기 위해서다. 그래야 그들도 개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죽음을 준비할 것 아닌가. K의 죽임과 일리이치의 죽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느새 우리의 삶 역시 개처럼 살아야 할지 인간으로 살아야 할지를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시간의 지평 위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재성 칼럼 14]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실장 ssyi@kmu.ac.kr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