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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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 "순수를 앞세워 판관임을 자처하지 못한다"


정규직은 무엇으로 사는가

정규직은 무엇으로 사는가. 비정규직이 겪는 불운을 먹고 산다. 그들의 불운 때문에 더욱 커 보이는 행운을 내심 자랑하며 산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편의상 갈라놓은 분류법이 아니다. 엄연한 사회적 사실, 우리사회를 이해하고 변혁하는데 그것 빼고 다른 것이 없다.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고통을 적극적으로 만들어낸다. 정규직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정규직이기 위해 기득권을 비판하고 투쟁한다. 이렇게 과도하게 말하는 것에 대해 발끈해도 어쩔 수 없다.

일하는 사람들의 관계는 사라지고 행운을 잡은 사람들과 실기한 사람들과의 관계만 남았다. 그 관계가 젊은 세대의 미래 삶의 문제, 교육의 문제로 확대되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분법은 시대의 문제, 현안이고 근본이 되었다. 부디 구조의 문제라고 비켜 가지 말기를 정규직 그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한다.

학부모는 무엇으로 사는가. 선행학습으로 앞질러가는 자식의 성공을 먹고 산다. 자식에게 정규직 가치를 얻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느라고 앞뒤 돌보지 않고 산다. 젊은 세대와 어른 세대가 맺는 문화계승과 문화확장의 관계는 사라지고, 성공한 자식과 그 뒤에 도사린 부모의 관계만 남는다. 내적질서감을 숙성시키는 양육의 가족관계는 사라지고 제 자식 기만 살리는 생존 관계만 남았다.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입시성적 우수자의 일류대 진학을 먹고 산다. 교육은 문제풀이와 정답을 각인시키는 기술 관계로 축소되었다. 죽어라고 입시 준비 시키고 돌아서서는 아무라도 대학 갈려고 하는 것이 큰 탈이라고 불평하는 교사가 아이들의 행실을 판정하고 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관계는 사라지고 없다.
 
우리는 모두 투쟁하듯 살고 있다. 정답을 표적으로 삼아 전술을 구사하며 비상하게 살고 있다. 범사에 감사하는 일상은 사라지고 없다. 전술을 구사하는 처세를 강요하면서 그 입으로 창의성이 미래의 경쟁력이라고, 마치 창의성이 우겨넣어서 될 그런 처세의 실체라도 되듯이 말하고 다닌다. 창의성은 참신한 생각에 붙인 이름일 뿐, 참신한 생각은 ‘잘 삶’의 산물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잘 삶'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은 관계적 사고를 허락하는 환경에서  그 재능을 발현한다
 
휴머니즘이다. 세계를 읽는 능력과 태도의 문제이다. 정답, 진리는 하느님의 것이니 하느님에게 돌려준다. 인간의 것, 물음을 가지고 사는 삶이야말로 인간의 것이다. 노력하는 인간, 노력하기에 방황하는 살아 있는 인간을 재발견한다. 진리, 정답을 해체하고 노력하는 인간을 마주한 것이 휴머니즘 역사의 기원, 르네상스 아닌가. 그 휴머니즘은 모든 아이들의 교육 받을 권리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권리는 여전히 가능성의 지평으로 남아 있다.

비판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교육은 확신을 유보한다. 물음을 이어가는 프로그램이 교육의 근거이다. 프로그램을 매개하여 교사와 아이들이 만난다. 그 프로그램은 교육활동을 비판의 장에 올려놓는 합리의 틀이다. 그런데 교실을 밀실로 운영하는 교사들의 오만을 목격한다. 참교육한다고 자부할수록 그는 비판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자신의 프로그램을 공개하고 그리고 그 프로그램의 전개를 다른 이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기록한다. 서식에 맞추어 적은 이력이 생생한 삶의 내력이 아니듯이, 아이들의 성적과 행실을 적는 것은 행정적 편의일지언정 교육적 삶의 기록은 아니다. 교사는 불안을 안고 살 수밖에 없다.

학생의 두발, 그것이 인권이라고 주장하려면, 물음을 이어가는 프로그램이 거기에 작동하고 있음을 먼저 증거해야 한다. 두발을 인권의 문제로 제기하는 의식이 뚜렷하다고 자부하는 교사는 먼저 자신의 프로그램을 비판의 장에 내 놓아야 한다. 세상을 떠난 전직 대통령이 북한의 인권을 들먹이는 ‘의식없는’ 사람들에게 배고픔만한 인권이 어디 있느냐고 목메어 질책했듯이 그러하다.

물음을 이어가는 설명력

모든 아이들 저마다 하늘로부터 재능을 부여 받았다고 인정하는 것, 그것이 학생의 인권을 신장시키는 보루이다. 그 재능을 살리고자 고심하는 것이 가르치는 자의 자리이다. 재능은 흥미로 존재한다. 흥미는 노력으로 존재한다. 노력은 발견감으로 존재한다. 흥미와 노력은 평생의 배움으로 존재한다. 배움은 인간다움으로 존재한다. 인간다움은 정신적 필요의 충족으로 존재한다.

가르치는 자는 아이들의 재능을 철학해야 한다. 설명할 수 있는 것만을 가르칠 수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유보한다. 정신 그 자체를 가르치지는 못한다. 설명할 수 없기에 그렇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몸소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보여주는 모범이 되는 교사이기를 기대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을 교직의 임무라고 할 수는 없다. 물음을 이어가는 설명력, 그것에 실패하고 다른 모든 것에 성공해도 그를 참교육했다고 칭찬할 수 없다. 
 
잘 삶, 진화를 실감하는 새해를


포퍼가 말하듯, 가르치는 자는 시대와 불화할지언정 시대의 판관은 아니다. 순수를 앞세워 판관임을 자처하지 못한다. 현장을 책임지는 일이 먼저이다.  나는 그것을 가르치는 자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물음의 프로그램은 목청을 돋구지 않고서도 시대의 흐름을 속 깊이 드러내어 말하는 방식이며 그 방식을 향유하는 사람들이 교사말고 또 있을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분리된 환경에서 '잘 삶'은 없다. 교육은 잘 삶의 환경에서 비롯되고 잘 삶을 풍부하게 한다. 이점에서 교육은 정치이다. 물음의 프로그램으로는 부족하다. 그렇다고 뜨거운 정치적 분쟁에 휩쓸릴 수는 없다.

'직장 나누기'의 큰 그림을 프로그램을 만들어 세상과 불화한다. 이 일을 행하는 교사들을 만나고 있다. 그들을 만나며 그래도 우주가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진화를 실감하는 새해를 기다린다. 다시 교육은 변변한 직장을 가지지 못한 채 살아갈 젊은 세대의 문제를 고민하는, 교사의 현실감각에 터한 아이들을 향한 책임감의 발로라고 거듭 말한다.






[김민남 칼럼 20]
김민남 / 교육학자. 경북대 교육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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