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행 KTX열차에서 있었던 일이다. 옆 좌석에 앉은 60대 초반의 남자 4명이 이런저런 세상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부산에서 탄 듯한 이들은 학교 동기동창쯤으로 보였는데, 서울에서 있을 새해모임을 위해 올라가는 것 같았다. 화제 중에 신문 이야기가 나왔다.
- J일보는 참 읽을거리가 많아. 해설이나 토픽이 다른 신문에 비해 훨씬 풍부한 것 같아.
"그런 소리 하지 마. 젊은 사람들한테 그런 소리 했다간 상대를 안 하려고 들어. 그 신문 읽는다는 이야기만 나와도 상대가 안 될 사람으로 외면해 버린다고." 요즘 우리사회에 일고 있는 사회갈등의 단면이다.
한국은 세계유일의 분단국이다. 남과 북이 갈린 것은 시대적 상황이었지만, 그 후에 일어난 민족상잔의 명분은 이데올로기였다. 그게 지금도 좌(左)냐 우(右)냐는 식의 시대착오적 논리로 남아, 치열한 공방의 구실이 되고 있다. 그런데 막상 한반도를 벗어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그런 논쟁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다.
냉전의 기운이 아직 채 가시기도 전에 그런 이념적 공방이 사실상 쓸데없는 공염불이란 사실이 설득력을 얻은 것은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이 내세운 흑묘백묘(黑猫白猫) 논리의 덕이었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뜻의 이 말은 편향된 이념에 젖어 있던 중국 사람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것은 오늘의 중국을 G2로 끌어올린 중심철학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보수적인 연장자들은 진보적 색깔을 가진 사람에 대해 주저 없이 빨갱이라고 부른다.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지나친 보수적 색깔의 모습이 역사발전을 저해하는 수구꼴통으로 비친다. 그러니 아예 둘 사이에는 대화가 성립되지 않는다. 아직도 보수적인 일부 경상도사람들은 특정지역의 사람들을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서슴없이 재단해버린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내편이 아니라는 이유로 서슴없이 적으로 단정해버리기도 한다.
사람사회에서는 어디서나 생각의 차이와 그에 따른 갈등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정도가 지나치지만 않다면, 파도가 바다의 정화에 기여하듯, 공동체 발전에 순기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나치면 사회통합을 저해함은 물론이고,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는 원인이 된다. 진보와 보수의 모습도 마찬가지다. 진보와 보수가 서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그것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점진적 사회발전의 동력이 되지만, 지나치면 역작용의 원인이 된다.
남의 존재를 인정해 주지 않는, 독선이 횡행하는 사회는 누가 봐도 민주적 역량이 모자라는 후진사회다. 우리사회에 상존하고 있는 이념적 갈등은 시대조류에 역행하는 후진사회의 전형이다. 연초에 많은 종교계 인사들의 신년덕담 속에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메시지가 유독 많이 담겼던 것은 우리사회의 갈등이 적정수준을 넘어 섰다는 경고였다. 어느 신문의 신년대담에 실린 문수산 금봉암 고우 큰스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시대를 바로 진단한 키워드가 아닌가 한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소통은 진정한 소통이 아니다.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쌍방적인 사고를 하는 대표적인 리더다."
[김상태 칼럼 1]
김상태 / 전 영남일보 사장.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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