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출발점에 선 아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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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환 / "여러분이 잃어버린...다시 찾아갈 가치로운 삶을 위하여"


안녕,
이제 헤어질 때가 되었습니다. 예정된 날이고 올 수밖에 없는 날이 온 것인데, 이런 날에 나는 늘 어떤 말로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곤 했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 글을 내가 읽을 수는 없습니다. 갑자기 목이 뜨거워져서 다 읽지 못하게 될 수도 있고, 졸업날의 어수선함에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니까요.

  어제는 비가 내렸고, 이젠 봄이 눈앞에까지 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나긴 기다림의 끝자리에서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마치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철로 가에서 다음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새로운 출발을 하는 사람은 지난날의 나에게서 먼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미 걸어온 길이 있고 그 길 위에 찍어놓은 자취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차를 타고 어느 길을 가든 그 길 위에 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온 내 길 속에 이미 새로운 길은 자라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치 봄날에 싹을 발견하고 우리가 놀라지만, 발아래 흙을 조금만 파 보면 그 나무나 풀들의 싹이 겨우내 언 흙 밑에서 봄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려 왔는지를 발견하고 더 놀랄 수밖에 없듯이.    

여러분이 잃어버린...

  그러기에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서 길을 찾는 일이 가장 중요할 듯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주어진 환경 속에서 내 삶을 어떻게 꾸려왔는가, 나는 지난 3년 동안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잃었는가? 얻은 것의 가치는 어떤 것이며, 잃어버린 것들은 정말 내가 잃어버려도 좋을 것들이었는가......하는.

  여러분은 오로지 대학 입시라는 거대한 쓰나미에 묻혀 오느라, 의미 있는 체험을 통해서 자신을 설계할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고통도 참아내야 했고, 가치 있는 체험 기회들을 유보할 수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여러분이 스스로의 미래를 그리고 세워갈, 가장 소중한 기회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았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청소년기에 꿈을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으니, 우리 앞 세대가 여러분에게 물려준 가장 치명적인 유산으로 남을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해마다 내가 여러분에게 오늘처럼 반성문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지난날의 삶에 대해 스스로 평가하고 길을 수정해 나갈 시간적인 여유와 자유로움이 아닌, 지금과 거의 다를 바 없는 닫힌 시간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구직 전쟁이 그것입니다. 내가 대학생으로 살았던 시대에 겪었던 정치적인 부자유의‘고통’이, 여러분의 시대에는 먹고 사는 내일을 확보해야 하는‘생존 전쟁의 고통’으로 바뀐 것입니다. 쏟아지는 물량, 생활의 편리를 가져다주는 무수한 상품들이 우리를 현혹되게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우리가 진보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생존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훨씬 크고 많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살아남기 위한 전쟁에 이미 뛰어들었습니다. 대학 진학과 학과 선택이 곧 취직 전쟁의 시작으로 자리 매김되는 현상이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는 현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고 누구보다 여러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많은 사람들은 그 길을 따라 무작정 걸어갈 것이지만, 또 많은 사람들은 그 길을 걷기에 앞서 한 번 더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눈앞에 놓여 있는 길을 다시 생각할 것입니다.

  사람의 길은 한 가지만이 아니며, 다양하게 열려 있습니다. 다만, 물질적인 욕망의 덫(혹은 어떤 이는 늪이라고도 표현하지만)에 걸려 허우적대느라 그 길을 찾지 못하고, 다른 이들이 걸어간‘편하고 안전한 길’만을 서로 차지하려다 보니, 가치 있고 소중한 다른 길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놓치고 있는 것뿐입니다.

  생존이 갈수록 절박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생존이 무엇보다 우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생존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조건일 뿐,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충분한 조건은 아닐 것입니다. 고귀한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는 길은 그이상의 어떤 것에 있으며, 그것은 물질을 넘어 궁극적으로 삶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는 가치로운 것임이 분명합니다.

배움이 깊어갈수록...

  이제 나에게 그것이 무엇일까를 스스로 생각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나는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철학의 뿌리 위에서만 장차 실패하지 않는 삶, 인간다운 삶을 세워갈 수 있을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배움이 깊어갈수록 자유로운 사람,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알고, 스스로 낮은 곳을 찾아 서로 나누며 사는 겸허한 사람, 예술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풍부한 감성을 지닌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흙의 가치와 생명을 소중히 생각하고, 이 땅에서 나온 먹을거리를 아껴서 가족의 건강을 지켜내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좀더 자라고, 좀더 깊어져 있을 때, 옛날 여러분의 문학 교사가 던진 이 말의 의미가 생각날 것이고, 그 말이 옳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날이 너무 늦지 않도록, 하루라도 빨리 오기를 바랍니다.      

  참 중요한 시간을 여러분과 함께 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나누고 싶었으나 그리 하지 못해서 언제나 미안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좋은 추억이나 즐거웠던 추억을 만들고도 싶었지만, 마음뿐이어서 안타까웠습니다. 여러분과 더 많은 꿈을 꾸고, 더 많은 시간과 더 많은 즐거움을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바라오면서도, 갈수록 각박해지는 현실의 벽과 늘 마주 설 수밖에 없어서 슬프기도 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지난 1년 동안 마음의 여유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과 함께 했던 지난날들을 나는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시간도 헛되이 흘러가는 법은 없습니다. 잔바람도 풀이나 물결에 흔적을 남기듯이, 우리의 만남도 여러분과 나의 마음 깊이 어떤 흔적을 만들어 놓았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그 흔적들조차 소중히 여겨주기를 바랍니다. 때로 그 작은 흔적들이 여러분을 지난날로 안내하기도 할 것입니다. 고통스러웠으면서도, 가끔씩은 함께 있음으로 해서 따뜻하기도 했던, 그 시간 속으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주말에세이]
배창환 / 김천여자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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