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인력시장의 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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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 칼럼] "불손한 요구에 따라가기 바쁜 대학, 아니다"


우시장의 추억

예전에는 하양 시장 한 모퉁이에 우시장이 있었다. 장날이면 순해 터진 소들이 팔려갈 때를 기다리며 슬픈 냄새를 뿜어냈다. 이제 거기 질척하던 흙바닥에는 말끔한 시멘트 포장이 깔리고, 소들이 웅성대던 자리에는 자동차들이 빈틈없이 들어찬다. 정겨운 소 울음소리와 껌벅이는 소의 눈빛 따위는 망각의 공동묘지 어딘가에 묻혀 가고 있다. 그 사이에 우리 삶의 템포는 펄럭이는 욕망의 깃발을 따라잡겠다고 미친 듯이 빨라졌고, 다른 존재 혹은 타인을 향한 감각은 턱없이 빈곤해졌다.

요즘 대학가 풍경은 어쩐지 그 동안 무의식 깊숙이 파묻혀 있던 우시장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전의 촌스러운 우시장이 아니라, 두당 얼마라는 계산만 남고 일말의 낭만도 사라진 우시장, 아니 인력시장. 인력시장의 셈법은 소를 사고 팔 때와 별 차이 없이 단순하다. 학생들을 정규직에 밀어 넣으면 두당 인센티브 얼마, 비정규직일 경우에는 또 두당 얼마라는 식의 너무도 솔직하고 낯 뜨거운 이야기가 위세 당당한 공문으로 돌아다니는 것이다. 공문인지라 개그 취급할 수도 없고, 심각한 협박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신상에 좋을 듯하다.

협박의 요지는 간단하다. 대학을 인력시장으로 개조하는 데에 동참하지 않으려면 조만간 대학생활 접을 생각도 하라는 것이다. 인문학적 감수성이니 판단력이니 인간해방이니 하는 거창하고 거룩한 이야기는 집에 가서나 하라는 냉소적 충고도 빠지지 않는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맹목적 생존담론 이외에 아무것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이 야박한 압력 앞에서는 대학서열도, 학과와 전공의 차이도, 또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의 오랜 반목과 갈등도 별 의미 없어진다. 모두가 한 목소리로 살아남자고, 살아남으려면 이웃의 경쟁 상대들을 밟고 올라서자고 다짐한다.

'학진'에 길들여진 대학

대학이 취업학원 단계를 넘어 삼엄한 인력시장으로 치닫게 된 데에는 누구보다 대학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지식인들 스스로 자본과 정치권력 쪽의 문제 있는 요구에 아무 문제도 제기하지 않고 고분고분 줄 서온 현실을 빼놓고 지금 대학가의 살풍경은 설명할 수 없다. 포악한 독재자들조차 어찌할 수 없었던 학술운동들이 '학진'(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체계가 정비되면서 스스로를 온순하게 길들여온 현상을 돌아볼 필요 있다. 정규직 교수들만 아니라 신진 연구자들까지 학진의 지원과 평가체제에 순응하게 된 후 학술운동만 아니라 학생운동도 소멸의 길로 들어섰다.

오늘의 대학들은 시대를 앞서가지도 시대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시장과 권력의 불손한 요구에 황감한 마음으로 따라가기 바쁜 존재로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지표들로 치장된 생존본능과 패권주의 이외의 어떠한 논거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 사이에 범사회적 위기에 대한 예견능력도, 약자들을 배려하는 미덕도, 힘을 모아 함께 문제를 풀어보자는 훈훈한 여유도,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려드는 진짜 싸움꾼 기질도 모두 내버리고 있다. 그와 함께 행복의 체험을 만들고 나누는 능력도 잃어버리고 있다.

필연처럼 보이는 지금의 대학, "아니다"

우리 사회의 신경중추인 대학이 자율적 비판적 사고의 열정을 멸시하고 행복한 공존의 길 찾기를 포기하고 있는 한, 정치권의 어지간한 변동은 십중팔구 또 다른 정치적 환멸의 준비과정이 될 것이다. 미래의 주인공들인 청년 학도들이 학점과 취업과 코앞의 이익에 모든 것을 걸고, 선생들이 그들의 머리수를 수익의 변수로 셈하며 대학을 인력시장으로 단순화하는 데에 앞장서는 한, 이명박 시대는 예상보다 훨씬 더 길고 험할 것이다.

그래야 할 필연성은 어디에도 없다. 필연처럼 보이는 것들 대다수는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일 때만 필연으로 군림한다. 협박이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알아서 기는 사람들에게만 협박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른바 대세가 늘 인류가 걸어야 할 정답이었던 것은 아니다. 로마 제국이 깨지고 중세 피라미드가 무너진 옛날로 돌아가볼 필요도 없다. 그 동안 우리 사회의 공리처럼 신앙화되어온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체제도 그 본토에서부터 무너지는 꼴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이제부터라도, 나부터라도, 지금의 대학정책과 대학문화를 향해 ‘아니다’를 외쳐야 할 것 같다. 취업이나 생존의 필요성이나 중요성을 부정해서가 아니다. 적어도 지금의 지배구조를 고착시키고 생존방식을 악화시키는 데에 별 생각 없이 부역하기는 싫어서다. 그 대가로 생존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본다. 오히려 단호히 아니라고 말할 때 훨씬 더 풍부하고 즐거운 삶이 열릴 것이다. 물론 당장은 손해 보는 일도 있겠지만, 단순한 손익계산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자유와 의미의 짜릿한 맛을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때로는 우시장의 추억과 소들의 슬픔도 조금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홍승용 칼럼 46]
홍승용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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