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는 교육과 관련해서 작은 균열을 경험했다. 고려대 김예슬 학생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선언과 서울대 채상원 학생의 “오늘 나는 대학을 거부한다, 아니 싸움을 시작한다”는 선언이었다. 물론 두 사람의 저항이 한국 교육에 어떤 파열음을 낼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들의 작지만 결연한 목소리가 한국 교육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당위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 파장은 크다.
한국 교육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는 제 정신 가진 사람이면 다 안다. 어디를 어떻게 손대야 할 지 알 수 없는 파탄 상태다. 많은 정책적 진단이 있으나 현명한 처방은 없다. 백약이 무약이다. 이는 한국에서 학교가 더 이상 참된 의미의 학교가 아니며, 교육이 더 이상 참된 의미의 교육이 아님을 의미한다. 초중등 교육은 2% 줄세우기를 위한 입시지옥으로, 고등 교육은 취업학원이 된지 이미 오래다.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는, 마치 한국 교육의 현실을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교육에는 언제나 두 가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그 적들은 정부와 부모다.
필자는 선생으로서 평소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보다 나은 교육을 할 것인지를 고민하던 차에 우연치 않은 기회로 한국 교육을 고민하는 두 번의 강연에 참석한 적이 있다. 한번은 4월 8일 ‘대구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주최로 열린 “탈선과 혼돈의 시대, 한 대학총장의 고민”이라는 대구대 홍덕률 총장의 강연이었고, 다른 한번은 4월 20일 ‘계명대여성학연구소’ 주최의 “내부로의 망명 또는 낙오자 되기”라는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의 강연이었다.
한국 교육에 대한 두 사람의 고민 지점은 비록 대상을 달리 했지만 그 내용은 다르지 않았다. 우수한 교육으로 ‘대학의 지성 회복’과 ‘대학의 도덕성 회복’을 주장하는 홍총장의 주장이나 교육은 ‘인간성의 자기실현 과정’이며,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대칭적 관계’를 통한 ‘자유로운 만남’임을 주장하는 김교수의 주장에서 한국 교육에 대한 두 사람의 깊은 고민이 만나고 있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이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서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인간은 양육만이 아니라 동시에 교육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인간은 교육을 통해 인간답게 되는 방법과 올바른 삶을 꾸리는 이치를 배운다. 말하자면 교육이라는 것은 학교수업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에 걸쳐 지속되는 것으로써 인간을 인간답게 기르는 것을 말한다.
교육이란 단어는 ‘가르친다’는 의미의 교(敎)와 ‘기른다’는 의미의 육(育)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교에는 윗사람은 베풀고 아랫사람은 모방한다는 뜻이, 육에는 선을 행하도록 젊은이를 기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일반적 의미에서 교육은 바람직한 인간을 형성하고 보다 나은 사회 변화를 위한 수단으로 가정, 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그때그때 이루어지는 모든 작용이라 정의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한국 교육의 지표는 서울대학교다. 모든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서울대학교 진입에 있다. 그런데 지금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의 70%를 소득상위 20%가 차지하고 있다. 한마디로 서울대학교는 완전한 계급학교가 되었다. 그래서 서울대학교를 해체하지 않는 한 한국 교육은 없다는 역설이 나온다. 교육의 기회균등은 모두의 권리이다. 교육의 기회균등을 통한 사회생활에서의 기회균등은 사회정의의 밑거름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학교는 계층이동의 통로가 아니라 계층고착화의 통로로 작동한다. 대한민국의 유일한 경쟁력은 학벌자본의 획득에 있다.
한국 교육 어떻게 할 것인가? 적어도 우리의 아이들이 창의력(상상력), 문화적 감수성(소통능력), 글로벌 역량 그리고 시민적 덕성을 가진 아이로 성장하기를 원한다면 “학교에 보내지 말라”는 김교수의 주장은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학교를 보내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별로 없다는 점에서 이상적이고, 입시경쟁과 학교서열화에 내몰린 교육 파탄이란 점에서 현실적이다. 어쨌든 한국 교육의 문제는 총체적이다. 개인의 의식적 결단도 중요하고 제도 내에서의 변화도 중요하다.
곧 교육감선거가 다가온다. 교육감이라는 자리는 각 지역의 교육을 책임지는 자리다. 교육이란 단어에 담긴 뜻을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교육철학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하는 자리다. 우리는 이미 경기도 김상곤 교육감을 통해 교육감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인지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희망하는 우리 지역의 교육감은 적어도 이런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첫째, 문제풀이 점수경쟁교육이 아니라 창의적이고 협동적인 교육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 고교선택제와 같은 제도를 도입해서 학원 선택하는 것처럼 학교를 선택하게 해 서열화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학교간의 심각한 격차를 해소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셋째, 학생인권을 보장하고 교권이 확립된 배움과 성장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넷째, 교사들을 잡무에서 해방시키고 교장선출권을 학부모에게 확대하며 부정부패를 근절하는 교육행정 혁명을 실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다섯째, 특권차별교육을 철폐하고 한 명도 포기하지 않는 책임교육과 교육복지 혁명을 이루겠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여섯째, 개인의 욕구와 공동선의 방향이 일치할 수 있는 교육혁명을 이루겠다는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이재성 칼럼 18]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실장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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