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함 침몰 장병들에 대한 추모물결이 전국을 휩쓴다. 영결식을 하루 앞둔 28일, 전날에 이어 하늘도 젊은 넋들의 슬픔을 아는지 차가운 비를 뿌리고 초겨울 같은 북풍을 거세게 뿜어낸다. 꽃다운 나이에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다가 운명을 달리한 장병들에게 머리 숙여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한다. 아울러 그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보내드린다.
전국이 비통한 마음으로 옷깃을 여미는 엄숙한 순간에 근거 없는 대북 증오심을 부추기면서 젊은 장병들의 죽음을 부당하게 이용하려는 세력이 날뛴다. 일부 수구 언론의 경우 천안함 침몰 원인을 규명하려는 작업이 막 시작된 상황인데 벌써 결론을 내고 단호한 응징을 소리높이 외친다. 전 세계가 주시하고 있는 마당에 이 무슨 해괴하고 창피스런 짓인가?
사고 원인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수준 높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도록 전체 사회가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일부 수구언론이 무지하고 대단히 위태로운 작태를 보이는 것은 대외적으로 수치스런 일이다. 언론으로써 최소한의 원칙도 지키지 않는 반사회적 행위다. 문제는 수구언론뿐 아니다. 민관합동조사단의 모습 또한 괴이하고 부적절하다. 인양한 함수와 함미에 대한 정밀 조사조차 시작되기 전에 폭발에 의한 침몰이 분명하다고 공개발언을 한다. 눈으로 살핀 결과라 한다. 이런 방식이 바로 주먹구구식이라는 것 아닌가.
천안함 침몰 원인을 조사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서 전문가들이 와있는 상황이라면 조사의 ABC는 갖춰야 한다. 선진화를 추진한다는 나라에서, 조선 산업이 세계 1위, 군사력 세계 5~6위라는 나라에서 이런 후진적 조사방식이면 곤란하다. 세계가 비웃는다. 그런데도 일부 수구언론은 그것을 발판 삼아 ‘북한 네가 아니면 누가 했겠어’하는 식의 폭력적 논리를 쏟아낸다.
대북 증오를 부추기는 일부 수구세력과 수구언론 등의 모습을 보면 잘 짜여 진 협동작전과 흡사하다. 한 쪽에서 어떤 가정을 전제로 한 가능성을 제시하면 다른 쪽에서는 가능성을 실제 상황쯤으로 격상시켜 대북 공격 수위를 높인다. 수구세력이 북한 책임론을 일찌감치 들고 나오는 것은 사고 진상 규명이나 사고 재발 방지 등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천안함 선거’ 변질시키는데 큰 기여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숙한 민심이 수구언론의 선동적인 북풍 몰아가기로 방향감각을 잃을 것 같지는 않다.
젊은 장병들의 비극 앞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냉정하고 정직해야 한다. 이번 사고의 발생 원인에 대한 조사가 국제법상 효력을 지니려면 두 가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는 사고원인이 폭발이라 할 경우 폭발물의 실체를 밝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폭발물의 발사를 누가 했는지를 규명해야 한다. 이 두 가지가 충족되지 않으면 아무리 심증이 간다 해도 특정 국가를 주범으로 지목할 수 없다. 지구촌이 무법천지가 아닌 한 이런 원칙에 입각해서 이번 비극에 접근하는 차분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천안함의 비극 원인에 대해서 이제 조사가 시작된 단계다. 전 국민이 깊은 슬픔에 잠겨있는 상황에서 아무 근거도 없이 정황논리만으로 특정 국가에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진상 규명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 수구언론이 하는 것처럼 원인이 밝혀지기도 전에 북한 응징론부터 앞세우는 것은 다국적 조사단에게 부적절한 압력으로 작용하는 등 진상 규명을 저해하는 원인이 될 우려가 크다.
섣부른 예단은 운명을 달리한 장병을 모독하는 짓이다.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진상 규명부터 철저하게 이뤄져야 한다. 천안함이 비극을 당한 시점이 한미해군합동군사훈련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그런 비극을 사전에 막지 못한 책임 소재 규명 등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일부 정치인이나 수구언론이 앞장서서 대북 응징론을 직간접적인 방식으로 떠벌리는 짓을 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결과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치밀한 계산의 결과로 보인다. 이번 사고는 국방부 장관이나 일부 전문가들이 예측하는 것처럼 영구미제 사건이 될 가능성도 있다. 사고 발생 당시 한미 해군은 북한 등 외부로부터의 침투 사실을 전혀 포착하지 못한 것으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국무부가 사건 초부터 북한의 개입 가능성에 부정적 견해를 일관되게 표시하는 것은 국제 사회를 향해 이번 사고의 결론이 어떨 것인가를 예고하는 암시의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점을 살필 때 이명박 대통령 등 일부 정치인이 ‘단호한 응징’을 합창하듯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은 매우 어색해 보인다. 일반인들조차 이번 사건의 결말이 어떨 것인가를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청와대 등이 비현실적인 강경발언을 할 경우 더 많은 유언비어의 원인을 제공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 뿐 아니다. 청와대 등이 마치 단호한 대응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강조하는 것은 자칫 대국민 기만극과 같은 오해를 자초한다. 정치는 정직이 최선이다. 만에 하나 영구미제의 결론을 예상하고, 그것에 미리 대비하기 위해 계산된 언행을 한 것이라면 그것은 차원이 다른 화를 부를 수 있다.
[미디어오늘] 2010년 04월 28일(수) 12:00 고승우 논설실장 ( 미디어오늘 = 평화뉴스 제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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