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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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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 칼럼] "사라진 것으로 생각한 공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제 내가 읽은 두 권의 다른 책은 우연찮게도 파시즘에 관한 이야기를 동시에 다루고 있어 흥미롭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을 어떤 내용으로 메워야 할까라고 고민하고 있는 이 순간에 서로 다른 두 권의 책에서 파시즘에 관한 논의가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나의 관심이 그 쪽으로 흘러가고 있어 반드시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런 종류의 논의를 책에서 발견하여 기억하고 있을 수 있고, 아니면 우리사회가 돌아가는 것이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과 너무나 유사하여 평소 같으면 그저 지나쳤을 법 한 내용이 내 머리에 와서 박혔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어제 읽은 두 권의 책은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과 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하다’이다. 조금 길 수도 있지만 두 권의 책에서 언급되어 있는 파시즘에 관한 부분을 옮겨 보자. 

먼저 칼 폴라니의 말이다.
"독일에서도 이탈리아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의 상황을 보면 공산주의가 성립할 확률은 전혀 없었음이 입증된다. 그렇지만 그 비상사태 속에서 노동계급이 자신의 정당과 노동조합을 앞세워 자유계약과 사적 소유를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원리로 확립해놓은 시장의 원칙들을 마구 무시해버릴 가능성이 높았음도 분명하게 증명된다……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것이 있지도 않은 신기루였지만 노동계급이 시장에 마구 개입하여 재난을 불러들일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은 부인할 길이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실이 바로 사람들 마음속에 공포가 들어앉게 된 원천이었으며, 이 공포가 어느 결정적 국면을 만나자 마침내 파시즘의 발광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칼 폴라니, 『거대한 전환』, 홍기빈 옮김, 도서출판 길, 485쪽)

다음은 가라타니 고진이 파시즘에 대해 설명이다.
"파시즘이라고 하면, 대중을 탄압하는 억압적 체제라는 관점이 취해집니다만, 그것은 후진국의 독재체제와 혼동하는 것입니다. 파시즘은 오히려 대중의 압도적 지지에 의해 실현된 것입니다. 또 파시즘이라고 하면, 반유대주의나 군국주의 또는 침략주의와 결부시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원조 파시즘인 이탈리아에는 반유대주의도 침략전쟁도 없었습니다. 스페인의 파시스트 프랑코도 제 2차 대전 때는 중립이었습니다…… 독일의 에른스트 블로흐라는 철학자는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왜 파시즘에 패했는가를 묻고 있습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파시즘은 자본주의화에 의해 파괴되어가는 공동체나 옛 사회형태를 새로운 형태로 회복시키려고 했습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는 그것을 그저 부정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파시즘에 졌다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정치를 말하다』,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111쪽)

신기루

이 두 사람의 생각이 조금 난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 약간의 풀이가 필요할 수 있겠다. 더구나 지금 우리사회의 경험을 토대로 말하면 아마도 더욱 실감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폴라니는 독일 파시즘의 등장 배경으로 있지도 않은 공산주의 위협이라는 신기루를 지목한다. 신기루를 만들어내어 위협을 과장하는 방식은 지금껏 우리 사회의 경험과 일치한다. 북한은 언제나 절묘한 시기에 우리 사회의 위협으로 등장하여 사람들 마음속에 호전성을 불러일으킨다.    

노동조합에 대한 설명도 너무나 적절하다. 공산주의 혁명은 신기루처럼 가까이 있지 않지만, 노동조합은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재난이다. 폴라니가 “노동계급이 시장에 마구 개입하여 재난을 불러일으킬 위치”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실재하는 사실을 묘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일반적으로 파시스트가 노동조합에 가진 적대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민주노동당에 후원금을 낸 전교조 교사의 행위는 위험천만한 재난적 행위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자유계약과 사적 소유를 신성불가침의 절대적 원리로 확립해놓은 시장의 원칙들을 마구 무시”하는 사람들로 밖에는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폴라니는 파시즘을 공포가 발광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하고 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말하면 1970년대말의 긴급조치하의 유신 시대와 1980년대 초반의 광주민주화 운동과 그 진압 과정, 그리고 이후 전개된 일련의 사태 속에서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서슬 퍼런 공포를 실감한 바 있다. 우리 사회의 발전상을 이야기할 때 다른 측면은 몰라도 사회 전반에 걸쳐 그러한 공포가 사라진 것을 나는 너무나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공개석상에서 무슨 말을 할 때, 옆에서 누군가 지켜보고 있다가 잡아가지나 않을까하는 공포감이 사라진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는 충분히 발전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런데, 웬일인가, 이제 사라진 것으로 생각한 그 공포가 문득문득 우리 사회의 한 중심에서 재연되는 것 같은 기시감(旣視感)으로 나는 지금 시달리고 있으니.   

국가와 네이션 
  
가라타니는 파시즘이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라고 주문한다. 그는 파시즘이 “자본주의화에 의해 파괴되어가는 공동체나 옛 사회형태를 새로운 형태로 회복”하려고 하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획득한다고 한다. 자본주의적 방식에 의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삶을 살아가는 대중들이 오히려 파시즘에 열광하는 것은 네이션이야말로 그들을 구원할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라타니가 말하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국가와 네이션을 엄밀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가는 권력을 사용하여 대중을 끊임없이 지배하고 억압하는 실체이나, 대중은 국가를 그렇게 받아들이기보다는 국가야말로 항상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환상에 매달려 있다. 대중이 국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그 환상을 가라타니는 네이션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되면 대중은 현존의 삶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네이션에 기댈 수밖에 없다. 가라타니에 의하면 대중은 네이션에 대해서 “종교를 대신하여 개개인에 불사성, 영원성을 부여하고 존재의 의미를 제공”한다고 믿는다. 우리 사회에서 현 정부의 친기업적인 경제 정책으로 인해 살림살이가 더욱 어려워진 일반 서민이 현 정부에 더 큰 지지를 보내는 것을 두고 정치학자들이 계급의 배신이라는 현학적인 말을 들고 나오지만, 이 경우 가라타니가 말하는 네이션이라는 개념이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설명하는데 더욱 잘 들어맞는 것 같다. 대중은 가부장적 권위와 종교적 맹신성을 적절하게 혼합하여 구사하는 정부에 네이션을 발견하고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마르크스주의 운동이 파시즘에 패했다는 가라타니의 설명도 재미가 있다.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국가를 우회하려고 했지만, 파시즘은 국가를 가부장적 공동체로 미화하여 적극적으로 대중의 의식에 파고들었다는 것이다. 가라타니의 이러한 주장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가 복지 예산을 확충하고 친서민 정책에 보다 적극적이었지만 대중의 적극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도 약간의 설명을 가능하게 한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는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권위를 파괴하려 하였으나, 기댈 곳이 없어 막다른 골목에 마주친 가난한 대중은 국가 권위의 파괴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국가가 제공하는 몇 푼 되지 않는 정부 지원에 연연하며 삶의 희망을 걸기보다는, 네이션이 제공하는 가부장적 권위와 공동체의 이미지에서 그들의 미래에 대한 총체적인 보상을 바라는 정서에 함몰되어 있다. 이 때 보다 유효한 방식은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죽은 이의 망령을 불러오거나, 또는 재래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상인에게 머플러를 건네주고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상이 폴라니와 가라타니의 말에 비추어 본 우리 시대의 파시즘의 모습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폴라니와 가라타니가 제시하는 해법에 주목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자. 폴라니는 파시즘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자유의 확대를 중시한다. 그는 “개인의 자유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옹호되어야만 하며 심지어 그 대가가 생산의 효율성과 또는 행정의 합리성같은 것이라고 하여도 그렇다”라고 말한다.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폴라니가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였지만, 시장의 자유는 철저하게 사회적 관점에서 통제되어야 한다고 했다는 점이다.

가라타니는 파시즘이 등장하는 것은 지금 현 상태를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적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가라타니는 국가의 억압을 벗어나고, 네이션에 대한 환상으로부터 깨어나고, 또 자본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가라타니는 이를 위해 화폐와 자본주의에 대해 대체통화, 신용 그리고 생산-소비협동조합의 연합이 주도하는 어소시에이션주의를 제안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사회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비록 상상의 세계에서만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하는 규제적 이념”으로서의 상상의 공동체가 없으면 한 사회는 언제든지 파시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김영철 칼럼 24]
김영철 / 계명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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