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자동차를 타고 아내와 도청교(道廳橋)를 지나고 있었다. 아내는 대학시절에 데모대에 섞여 도청교를 뛰어서 건넌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도청교를 쳐다보면서 푸르디푸른 젊은 시절을 떠올린 것이 틀림없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세상의 슬픔을 혼자 다 짊어진 사람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홀로 도청교를 걸어가고 있는 젊은 남자의 모습을 기억 속 깊은 곳에서 떠올렸다. 젊은 시절 혼자 쓸쓸하게 바람 부는 도청교를 건널 때 나는 염세주의자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아내와 나는 도청교에 얽힌 각자의 서사를 통해 아마도 이렇게 오랫동안 비밀스럽게 묶여있을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최근에 아내와 나는 주말 연속극을 같이 보곤 한다. 제주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드라마이다. 나의 젊은 시절 한때 로망이었던 장미희가 드라마에 출현한다. 그러나 내가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장미희 때문만은 아니다 (아내를 의식한 정치적 발언이라고 생각하지 말아 달라). 솔직히 말해 드라마를 보면서 이제까지 내가 만난 그 어떤 지방분권론자의 주장보다 나는 진한 감동과 영감을 받고 있다. 나는 드라마를 통해 나의 내면에 자리 잡은 서울에 대한 열등감이 해소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고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서울의 신화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서울은 언제나 모든 점에서 앞에 가고 있고 지역은 뒤에 처져 따라 가고 있다는 신화. 우리가 그동안 지방분권이라고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실은 그것은 서울 따라잡기 전략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드라마에서는 이러한 고정 관념이 통쾌한 반전을 이루고 있다. 드라마는 사람들에게 서울은 기껏해야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한 때 우리 사회를 선도했지만, 탈근대화 시대에 서울은 그 어떤 전향적 가치도 수용하지 못하는 그저 덩치 큰 괴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려내고 있다. 무엇보다도 동성애 문제가 드라마에서 압권이다. 글로벌 지구촌에서 동성애 문제는 탈근대와 진보를 상징하는 핵심적인 코드로 자리 잡고 있다. 드라마에서 서울은 동성애를 비롯해 그 어떤 기존의 인문적 가치를 뛰어넘는 것을 수용하지 못하는 억압적인 기제로 존재한다.
나는 드라마를 보면서 서울은 이제 과거의 도시로 전락하고 있다는 징후를 읽게 된다. 지역이 서울의 변방에 놓인 후진적 공간이 아니라, 새로운 휴매니티에 근거하여 사람 중심의 사회를 창조할 수 있다는 각성은 내가 드라마에서 얻은 즐거운 수확이다.
서사적 구성, 혹은 감성적 스토리 라인이 엄격한 논리적 틀보다 때로는 몇 배나 강력한 설득력을 행사한다. 나와 아내 사이에 그동안 함께 살며 만들어 놓은 때로는 즐겁고, 또는 슬픈 서사적 이야기를 제외하면 무엇이 남아서 우리 사이를 이어줄 것인가. 공동체라는 것은 서사를 기반으로 형성된다. 공간과 시간을 씨줄과 날줄로 해서 켜켜이 쌓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빼고 나면 우리가 사는 곳은 메마른 물리적 공간에 지나지 않을 터. 그렇다고 한다면 지역에서도 충분히 아름다운 삶이 가능케 하기 위한 지방분권론도 결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구체적 삶의 공간에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서사적 구조를 확보하지 않고는 생명력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대구경북에서 사람이 빠져나간다는 사실이 우려의 목소리를 뛰어넘어 위기감으로 번지고 있다. 대학에도 주중은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주말은 서울에 가서 사는 교수가 많다. 이들은 대구경북은 직장이 소재하는 곳에 지나지 않을 뿐, 이들은 대구경북의 사람들과 공간에 내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지 않는다.
아내와 내가 공유하는 도청교의 기억처럼, 지역에서 특별한 서사를 만들지 못한 이들은 정년퇴직을 하면 뒤돌아보지 않고 대구경북을 떠난다. 지역을 떠나는 사람들은 일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떠난다고 하지만, 나는 이들이 지역에서 서사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떠난다고 생각한다. 집 나간 며느리가 가을 전어 굽는 냄새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고 하지 않는가. 그립다는 것은 서사에서 비롯된다. 대구경북에 서사를 만들어낸 사람들은 지역을 떠나지 못하고, 떠나서도 그리워서 되돌아온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정의는 ‘우리 삶과 공동체를 해석하는 서사’를 무시해서 성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지역이 서사를 구성하는 힘을 되살려야 하고, 서사를 통해 공동체의 연대와 소속 의무가 형성된다. 그리고 그것이 정의다.
[김영철 칼럼 25]
김영철 / 계명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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