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사람들이 많이 몰렸습니다. 구경하려니까 겁이 나서 라디오만 듣고, 사람들 이야기만 듣고 집에 숨어 있었지요."
계엄령으로 텅 빈 도시의 적막을 찢는 총성에다 비명소리가 거리에 가득했다고 그때의 신문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시내에서 벌어진 상황을 숨어서 지켜볼 정도로 살벌한 분위기였다고 말합니다. 더욱 두려웠던 것은 자칫 후환이 미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다름 아닌 1946년 대구에서 일어난 ‘10.1 항쟁’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왜 해방 이듬해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요. 미군정은 ‘공출’과 ‘배급’이란 이름으로 갈팡질팡 식량정책을 펼칩니다. 이로 인해 대구시민 다수가 배고픔에 노출됐다고 합니다. 구할 수도 없는 쌀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오르고 그 틈을 노려 모리배들은 쌀을 매점매석했습니다. 게다가 옷만 갈아입은 일제경찰은 민중 위에 군림하는 행태를 되풀이 합니다. 당시 활자매체들은 이런 여러 이유들을 항쟁원인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70대 후반이나 80줄 노인들은 미군정이 경찰을 내세워 시행한 ‘하곡수집령’의 끔찍함을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시민에게는 배고픔의 대명사였던 반면, 생산 농민들에게는 먹을 양식도 제대로 남겨두지 않고 털어가다시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수만 명에 이르는 대구시민이 거의 들고 일어난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의 기억을 빌리면 항쟁이 틀림없는 듯합니다.
그는 이 와중에 색다른 경험을 합니다. 쌀값이 한 되 2백 원으로 치솟습니다. 이는 괜찮은 월급쟁이 한 달 치 봉급으로도 몇 되밖에 살 수 없는 가격입니다. 쌀값이 이러니 밥을 굶는 일이 먹는 일만큼이나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는 책 팔던 좌판을 잠시 접고 쌀을 구하러 전라도로 떠납니다.
그때만 해도 전라도에서 쌀 한, 두 말 사서 짊어지고 오면 얼마동안 밥걱정은 덜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전라도에서 쌀을 사오는 일도 당시로서는 금지였으므로 처벌을 각오하고 나서야 했습니다. 그도 이 때 화물차를 얻어 타고 전라도에 가 쌀 한 가마 정도를 사 온 일이 있습니다. 먹지 않고 이 쌀로 엿을 만들어 서울 가서 파니 꽤 돈이 되었다고 합니다.
‘10․1 항쟁’이 숙지자 그는 다시 책 판매에 나섭니다. 다행히 책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습니다. 학생 같은 예비 수요자가 있었던 데다 일본책 독자도 적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삼성당이 낸 영어 콘사이스는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였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배고픔이 해결된 건 아니었습니다. 그와 노점을 열고 고서를 팔던 다섯 명의 동료 중 두 명은 살길을 찾으러 차별받던 땅 일본으로 되돌아갑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식량 못지않게 책도 귀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엇보다 한글로 된 책들은 없다시피 할 정도로 귀했습니다. 이러니 책은 물려주고 물려받는 것이란 인식이 깊이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된 것이겠지요. 새 책도 더러 출판됐지만 잡지든 단행본이든 책하면 으레 고서점에 가서 사고파는 물건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물려주고 물려받는 것이 책이다’는 명제는 책을 파는 일에도 변화를 가져옵니다. 점차 사회경제적 공간으로 고서점이 자리를 잡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고서점이 문화의 한 영역으로 다가 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고서 판매를 계속해야하는 당위성과 어울리는 이유는 아닙니다.
“무엇보다 쓸 만한 전문 인력이 부족했던 시절이었지요. 하지만 막상 뭔가 일을 하려면 할 일이 없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 덧붙이는 글
연재를 준비하는 중에 박창호 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박창호 님의 명복을 빕니다.
[박창원의 인(人) 22]
다섯번째 연재 '고서 일생' 박창호②
글.사진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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