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예술을 보듬는 대구의 열린 마당"
지난 1990년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창립한 문화단체 <예술마당 솔>의 '부제'였다.
박재욱(53) 공동대표는 창립 당시 이 부제를 떠올리며 "심한 부침 속에 쉽게 딛고 올라서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소회를 말했다. 그러나 "이제 20년의 방점을 찍으며 새로운 방안을 찾겠다"며 20년 전의 꿈을 다시 새겼다.
예술마당 솔 20년...
예술마당 솔 20년을 기념하는 '장사익 소리판' 공연(12.4)을 앞두고 대구시 중구 남산동에 있는 이 단체 사무실을 찾았다. 4명의 공동대표 가운데 박재욱.손병열(48)씨를 만나 '20년'의 얘기를 들었다. 이 두 대표는 장사익 공연 준비를 위해 매일신문사(중구 계산동) 건물에 임시 사무실을 마련해 상주하고 있어 평소에는 이 사무실이 비어있다. 예전에 있던 사무국장을 비롯한 상근자도 없는 상태다. 이들 외에 김현식(교사).형남수(사업)씨가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박재욱 대표는 '솔' 창립과 활동, 갈등, 20년 소회를 담담하게 이어갔다.
예술마당 솔은 1990년 10월 1일 대구시 남구 대명동 지하 26평의 작은 문화공간에서 '김지하 강연'으로 닻을 올렸다. "민족예술을 보듬는 대구의 열린 마당"을 부제로 정지창(영남대 교수).정문태(극단 대표)씨를 비롯해 진보적 성향의 문화.예술인 수 백명이 뜻을 모았다. 이 곳에서는 지역 문화예술인들의 연극.노래공연 뿐 아니라 다양한 강좌와 모임도 잇따랐다.
특히, '솔 민족예술강좌'에는 김윤수(국립현대미술관장).유홍준(명지대 교수).이태호(전남대 교수)씨를 비롯한 전국적 인사들이 '한국미술사', '세계영화사', '야생초 강좌'를 포함해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강좌를 이어갔고 '그림을 사랑하는 모임(미술모임)'과 '우리 것을 아는 모임(문화유적답사)' 같은 특별한 모임이 생겼다. 강좌나 모임에는 수 십명에서 수 백여명이 참가할만큼 인기를 모았다.
공연.강좌.모임에 '해체선언.무효' 갈등..."심한 부침"
그러나, 2005년에는 대표진들이 예술마당 솔의 '해체'을 선언하고 정치장.염무웅(영남대) 교수를 비롯한 60여명의 회원들이 '해체선언 무효'로 맞서며 내분을 겪기도 했다. 당시 지역에는 '예술마당 솔 정상화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가 꾸려지기도 했다.
박 대표는 당시 갈등을 떠올리며 "예술마당 솔의 방향에 대해 생각의 차이가 컸던 것 같다"며 "서로 지향하는 쪽으로 가기는 했지만, 그 때의 심한 부침 속에 지금도 쉽게 올라서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솔의 20년 굴곡은 그들의 '공간'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1990년 남구 대명동 프린스호텔 뒤편 26평정도의 공간에서 시작해 지역 뮤지션과 연극인들의 많은 공연과 다양한 강좌를 마련했다. 신선한 문화단체에 대한 관심으로 관객과 청중들이 늘어나자 1995년 봉산동 봉산문화거리에 지하 100평 규모로 옮기게 된다. 이 때가 말 그대로 '잘 나가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2004년 봉산문화거리에 있는 1층 단층 건물로 옮겨 1년 남짓 지날무렵, 2005년 이른 바 '해체선언.무효' 갈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독립된 공간 없이 대구시민회관 내 대구민예총 사무실에 얹혀 지내다 2008년 현재의 남산동에 다시 터를 잡았다. 지금 사무실은 20평을 조금 넘는 정도로, 회원들의 모임만 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박재욱 대표는 "현재의 공간에서는 어떠한 공연이나 전시도 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20년쯤 됐으면 더 좋아져야 하는데..." 박 대표는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20년 전 창립 때와 지금의 고민을 털어놨다.
"80년대 후반에는 대구에 공연이나 전시할 공간이 없었다. 그래서 민미협과 극단 단체들이 '우리가 하나 만들자'고 뜻을 모아 예술마당 솔을 열게 됐다. 놀이패 탈, 한사랑 극단, 때풀이 극단을 비롯해 진보적인 많은 문화단체들이 참여했다. 그리고, 가수 정태춘과 돌아가신 김남주 시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참여한 '다시서는 봄' 공연을 대구에 열었고, 판화가 이철수씨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이름 있는 미술인들의 작품을 전시해 2천여만원의 성금도 모았다. 새로운 문화공연과 강좌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았다. 빈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욕심을 내 봉산동으로 옮기게 됐다. 그런데, 봉산동 10년 만에..."
손병열 대표는 "봉산동 시절, 회비를 내는 회원만 300여명이었고 답사나 행사 참가자를 포함한 회원은 1천명이 넘었다"며 "그 때 솔 소식지를 4천부이상 발송할만큼 지역의 관심도 많았다"고 기억했다. 그러나, 현재 솔 회원은 150여명으로 줄었다고 한다.
20년 지난 예술마당 솔. 이제 어떻게 가야 할까?
박 대표는 예전같지 않은 분위기를 전했다. 주체들의 생각과 지역의 문화환경의 변화였다.
그는 "돈도 돈이지만, 창립 당시에는 민족문화를 보듬자는 의지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의지나 초심이 조금은 희석된 상태다. 그 때는 우리 활동이 사명이고 목적이었고 여기에 혼을 쌓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꼭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20년, 지금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지 않나"
또, "그 때는 지역 문화예술인들이 맘 놓고 무대에 설 공연장이나 전시장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자고 나선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대구는 각 구청마다 웬만한 공간이 다 있고 강좌나 답사 같은 프로그램도 넘쳐난다. 좋은 변화지만, 20년 전 그 때 프로그램을 우리가 지금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지 않나. 그럼 뭘 할 것인가. 당장 공연.전시가 가능한 독자적 공간을 갖추는 게 우선이지만, 우리가 앞으로 뭘 할 지에 대한 고민 역시 크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박 대표는 "20년 방점 찍으며 새로운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세대간 차이를 극복하고 지역에 꼭 필요한, 새로운 문화운동의 장을 열어가겠다. '민족예술을 보듬자'던 창립 부제를 되새겨 여러 숙제를 풀어가겠다"고 말했다. 새로운 20년에 대한 의지가 엿보였다.
4일 '장사익 소리판'...15일 '20년 심포지엄'
예술마당 솔은 이같은 고민을 담아 오는 15일 오후 2시에 사무실에서 '지역문화사 20년 심포지엄'을 연다. 정치창 교수와 손병열 대표를 비롯한 지역 문화인사가 예술마당 솔 20년 역사를 되돌아보고 지역의 문예.예술운동과 새로운 20년의 방향을 짚어본다.
박재욱 대표는 "우선 장사익 공연이 잘 돼야 한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장사익 공연은 12월 4일 저녁 7시 영남대 천마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역(驛)'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 공연은 '찔레꽃'을 비롯해 장사익 특유의 감성으로 재해석한 노래들을 선보인다. 특히, 여행, 역, 산너머 저쪽, 기형도 시인의 엄마 걱정, 이게 아닌데, 허허 바다 등의 작은 주제별로 1,2,3부를 나눠 소리꾼 장사익의 진수로 초겨울 밤을 수 놓는다. 공연장 1889석 가운데 잘 보이지 않는 사석을 뺀 1700석의 좌석 티켓을 3만원에서 10만대에 팔고 있다. "다 팔아야 새 공간을 마련하는데...예전같이 않아 걱정"이라고 했다.
또, 오는 8일부터 14일까지는 경북대 대강당에서 '재래시장 예술기행전'을 연다. 이 전시는 지역 재래시장의 현재와 미래를 예술가들의 눈으로 재조명하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으로, 봉덕시장, 현풍장, 교동시장, 포항 구룡포의 새벽 경매시장과 달성공원 새벽시장, 번개시장의 모습을 사진 30여점을 비롯해 그림, 영상을 포함한 다양한 장르의 작품 150여점을 선보인다.
'예술마당 솔'이라는 간판 글씨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널리 알려진 신영복(성공회대 교수)씨, 간판 그림은 정하수씨의 작품이라고 한다. 박 대표는 '놀이패 탈' 출신으로, 30대 초반의 그는 벌써 5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은 손병열 대표와 함께 '공연기획자'로 대구의 여러 무대를 기획하고 있다. "민족예술를 보듬는 대구의 열린 마당"으로 출발한 예술마당 솔. 지나 온 20년을 되짚어 거듭날 그들의 꿈에 지역민의 눈길도 떠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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