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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를 넘어 다시 마르크스로
노태맹 / <대중들의 공포>...발리바르를 위하여
2011년 01월 28일 (금) 11:13:55 평화뉴스 pnnews@pn.or.kr

  수많은 후쿠야마들이 <역사의 종언>을 외치던 무렵, 1993년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은 계속 다시 망령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고 중얼거린다.  (데리다.<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2007)   마르크스주의자 아닌 데리다의 유령 들림.  “마르크스 없이는 없다.  마르크스 없이는 어떠한 장래도 없다.  마르크스의 기억, 마르크스의 유산 없이는.”  데리다는 마르크스주의가 단지 비판적 이념이나 질문하기의 자세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적 시장 질서로부터 고통 받는 대중들이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의 어떤 해방적이고 메시아적인 긍정, 약속에 대한 어떤 경험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푸닥거리에 맞서 마르크스의 정신, 마르크스라는 유령이 우리에게 부르짖는 호소에 귀 기울이고 그것의 명령을 상속하고 따라야 한다는 책임감을 데리다는 강조한다.  “이 강연을 하는 것은... 이는 무엇보다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서이다...우리의 책임은 무엇인가?  어떤 점에서 이러한 책임이 역사적인가?”

 이 책(강연)이 나온 1993년 무렵 나는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이나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솔 출판사의 입장 총서에서 나온 들뢰즈나 데리다 등등을 (이해도 하지 못한 채) 보고 있었다.  이미 헤겔,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루카치의 책들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책장 한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돌이켜보면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 서로 눈에 불을 켜고 죽일 듯이 덤벼들었던 사회구성체 논쟁이니 하는 이념 논쟁은 어쩌면 술 안주거리에 불과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러한 자괴감은 우리가 그 당시 (그리고 지금도)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 공부라는 것을 제대로 한번도 해 보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과장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빰'(플렛)과 복사물을 읽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이른바 386세대는 이념과의 해후만을 했을 뿐 그 이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고, 그것이 정세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이념들과 결별했다.     

 그러고 20년 여 년이 지났다.  몇 년 전 진보 정당의 한 당직자와 이야기를 하다가 근래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했더니 “아직도 마르크스에 대한 책을 보세요?”한다.  맞다.  과거의 변증법적 유물론이나 역사적 유물론이 가진 종말론적, 형이상학적 결론은 파산을 맞았다. 소련 과학 아카데미는 파산했고 책장의 그 책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별로 아까울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론이 계급 사회를 생산자 다수가 창조한 잉여 가치물에 대한 소수의 통제에 기초한 착취체계로 설명하는 것이라고 할 때 역사적 유물론의 기본 외형은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이 정의 속에 등장하는 각각의 용어들에 대한 재해석은 필요하겠지만.)   그때, “도대체 지금 어떤 책, 무슨 공부를 하고 계시나요?” 나는 물었어야 했을까?  소련 과학 아카데미가 마르크스를 다 설명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제 마르크스가 세상을 다 설명해 준다고 믿는 마르크스주의자도 없다.  문제는 자본주의다.  그 역사로서의 자본주의. 그것은 여전히 남아있다.  또한 문제는 이데올로기 비판이다.  근대의 민주주의, 시민, 민족, 국가, 그리고 그 정치에 대한 발본화로서의 이데올로기 비판.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이데올로기로써 이데올로기적이다.   

 발리바르와의 재회는 스피노자를 통해, 그리고 보다 직접적으로는 80년대 후반부터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천착해 온 윤소영 교수를 통해서이다.  탁월한 스피노자 학자들인 마트롱, 들뢰즈, 네그리 그리고 발리바르를 통해 스피노자의 ‘역량’을 옅보았다.  재회라고 표현한 것은 이미 90년대 초반 발리바르의 책들, <민주주의와 독재> <알튀세르와 마르크스주의의 전화>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등과 같은 책들의 제목은 눈에 익었으나 그의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관심이 없었던 탓이다.

   
▲ 도서출판 b. 2007
  그의 책들을 다시 읽은 것은 21세기의 첫 십년을 지나서야 <스피노자와 철학>(이제이북스. 2005) <대중들의 공포>(도서출판b.2007) <우리, 유럽의 시민들?>(후마니타스. 2010)같은 책을 통해서이다. 

물론 그 동안 공감 출판사의 윤소영 교수 책들 중에서, 그리고 사회진보연대의 기관지 <사회운동>같은 곳에서 그의 글들이 간간이 번역되고 있었다.  (발리바르에 대한 소개글들은 많이 있으나 우선 ,대중들의 공포>를 번역한 최원의 역자 후기 참조하라)
 <대중들의 공포> 역자 해제 전문 보기


 2010년 <레프트 대구>라는 잡지를 몇몇 사람들과 창간하면서 앞의 최원 씨가 번역해 놓은 발리바르의 <정치의 종언인가, 종언 없는 정치인가>라는 논문을 그에게 부탁해 실었었다.  계급, 정치, 민주주의에 관한, 마르크스가 가진 묵시록적인 혹은 이론적 아나키즘에 대한 발본화 작업들 중의 하나인 논문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은 ‘웬 발리바르?’ 였다.  발리바르를 알아야 (계급)운동을 더 잘 할 수 있다는 것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 어떤 이론을 알아야 한다는데 절대 동의하지 않지만, 이론들을 읽을 수 있고 공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성실한 태도이다.   알튀세르가 지적했듯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경제적 적대를 자본주의의 유일한 현실로 가정함으로써 이데올로기적 적대라는 또 다른 현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에 있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이데올로기야 말로 진리의 장소이다.   철학적으로 알튀세르를 계승하는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데올로기적 원인들이 갖는 효력의 원인 또는 규정은 경제적일 수밖에 없으며 마찬가지로 오직 이데올로기적 ‘원인’ 또는 ‘구조’만이 경제적 세력이나 이해관계가 이러저러한 사회적 효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해명할 수 있다.”

 가령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장하준의 경우, 우리가 그에게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발전-제도주의 경제학은 우리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가?  그가 바닥에 깔고 있는 이데올로기는 무엇이며 우리는 과연 그것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인가?  그의 ‘발전 전략’의 백그라운드이며 ‘제도’의 생산자인 국가에 대한 혹은 주체와 주권에 대한 해명 없이는 그의 ‘경제주의’는 또 다른 진보한 부르주아 정당의 이데올로기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이것이 과연 최선인가?’

 그리고 또한 그람시 적 오해가 있다. 그람시에게 모든 이행은 이데올로기 속에서 발생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작동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피지배자의 요구를 다양한 방식으로 지배 이데올로기 속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즉 새로운 지배 이데올로기의 형성을 강제함으로써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국가와 사회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통한 헤게모니 장악이라는 윤리적 국가 구성은 환상이다.  마찬가지로 그것이 부르주아 정당이든 진보 정당이든 당을 통한 (우리는 흔히 그것을 정권 창출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국가 구성을 기획하는 것도 환상이다.  (그러나 환상도 현실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전적으로 부정될 수만은 없을 것이다.)

“무한한 모순: 계급들의 투쟁은 계급들의 구성 자체, 국가적 조절, 사회적 계획을 초과한다.  그것은 역사의 정치적 물질성 속에서의 화해 불가능성의 심급이다.  바로 이 때문에 현실의 전화들이 있지만 그러나 보편적 주체도 역사의 종말 목적도 없다.”

 발리바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기초해 있는 사회 계약 모델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모두를 넘어서는, 국가와 정치에 대한 급진적 이론화를 시도한다.  마르크스의 이론적 아나키즘이 초래한 국가 사멸 기획을 국가의 민주적 전화의 기획으로 대체하면서, 해방의 정치와 변혁의 정치를 (안고) 넘어선 시빌리떼(시민 인륜)의 정치를 기획한다.  시빌리떼의 정치는 ‘갈등적 민주주의’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르키며 공동체의 초월적 동일성에 개인들의 생산을 종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개인들의 상호 확장적 생산을 위한 관개체적 연대의 유형과 구조를 발명하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평등주의가 아니라 개체성들의 차이화”인 것이다.

   





[책 속의 길] ②
노태맹 / 의사. 시인. 레프트대구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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