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원전(原電) 붕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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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홍철 칼럼] '국가-기업-전문가' 독재체제 몰락 예고, 민주주의 위해 풀뿌리 스스로 공부해야


  안전신화의 붕괴

  “죽음이 가까이 왔다”고 각오했을 때 생각한 것 중의 하나는, 될 수 있는 한 많은 메시지를 다양한 모양으로 여러 사람들에게 남겨야 하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 애석하게도 나는 ‘원자력 최후의 날’을 살아서 보지 못하고 먼저 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만 … 그것도 이제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이미 모든 현실이 우리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낙관만 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말기증상 속에서 거대사고와 부정(不正)이 원자력의 세계를 엄습할 위험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뒤에 남은 사람들이 역사를 꿰뚫어보는 투철한 지혜와 대담하게 현실에 맞서는 활발한 행동력을 가지고 일각이라도 빨리 원자력시대에 종지부를 찍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딘가에서 반드시 여러분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을 것입니다.

  평생을 원전(原電) 반대운동에 헌신하다 지난 2000년 10월 8일 세상을 떠난 ‘시민과학자’ 다카기 진자부로(高木仁三郞) 박사의 유언(遺言)을 지금 다시 꺼내 읽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가 생의 마지막에 우려했던 ‘거대사고’가 마침내 일본에서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번의 대지진과 그로 인한 원전 폭발, 끔찍한 방사능 오염 사태는 다시 한번 다카기 박사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너무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는 자신의 ‘유언적 저서’라고 할 수 있는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에서 “원자력발전은 안전하다”는 주장이 국가와 기업, 전문가들의 정보조작과 은폐에 의해 만들어진 새빨간 거짓말임을 폭로했다. 그뿐만 아니라, 원자력이 무한한 에너지라거나, 석유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에너지이자 ‘청정’ 에너지라는 따위의 주장들(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이데올로기 덕분에 요즘 우리는 이런 내용의 광고를 수시로 접하고 있다)이 사실은 허무맹랑한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낱낱이 밝히고 있다.

  원자력, ‘끌 수 없는 불’

  원자력발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것이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대해서 대단히 파괴적인 엄청난 양의 방사능 물질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원자력발전은 핵무기와 마찬가지로 ‘핵분열’이라는 ‘과학적 발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핵분열은 원자핵과 중성자를 충돌시켜 파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배출되는 핵분열 물질은 오랜 기간 동안(어떤 물질은 수백만 년 동안) 방사능을 내뿜으면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파괴한다. 다시 말해 원자력발전과 핵무기는 모두 물질 파괴라는 하나의 뿌리로부터 나와, 생명 파괴라는 유사한 결말을 낳는 것이다. 이러한 방사성 물질의 가공할 성질 때문에 다카기 박사는 원자력발전을 사람의 힘으로는 ‘끌 수 없는 불’이라고 했고, 사용후 핵연료 처리의 어려움(현실적인 불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원자력발전 시스템을 ‘화장실 없는 맨션’에 비유한 바 있다.

  원자력발전의 또하나의 문제점은 그것이 파국적 사고의 가능성을 일상적으로 안고 있다는 것이다. 원전에 ‘사고가 일어날 확률’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허무한 탁상공론에 불과하다.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후쿠시마 원전 역시 ‘확률적으로는’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극히 낮은 것이었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힘으로 정확히 예측할 수도 제어할 수도 없는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 앞에서 그러한 ‘확률’을 따지는 것은 인간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전에서 일단 거대사고가 일어나면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그리고 광범위한 규모로 파괴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원전과 민주주의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또 하나,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원자력발전의 문제가 민주주의의 문제이자, 국가-기업-전문가 독재체제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원자력 발전은 그 규모와 기술적 특성, 고도의 위험성 때문에 철저한 보안과 비밀주의, 그리고 권위주의가 바탕에 깔려 있다. 아니 그러한 비민주적 토대가 없이는 애당초 원자력 발전 시스템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후쿠시마 원전의 붕괴 이후 일본의 총리조차도 도쿄전력의 관계자들에게 “정확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고 불평할 정도인 것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원자력발전은 대도시(수도권은 말할 것도 없고)와 농어촌(지역)에 대한 차별, 전문가와 비전문가 사이의 차별, 국가-기업-전문가(핵개발) 세력 대 풀뿌리 시민 간의 차별이 전제되지 않고는 역시 성립할 수 없다. 핵폐기장 건설을 반대하며 치열하게 투쟁했던 부안 주민들이 당시 “그렇게 핵폐기장이 안전하고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차라리 그것을 여의도에 세워라!”고 외쳤을 때, 그것은 지역이기주의에 빠진 무지한 백성들의 억지가 아니라, 사실은 원자력발전이 안고 있는 비민주적 본질을 꿰뚫는 가장 핵심적인 비판이었던 것이다.

  특히, 그 지역에 살지 않고, 또 그 지역의 운명에 일말의 책임감도 느끼지 않는 ‘중앙’의 ‘전문가’들에 의해 정책이 입안되고 입지가 선정되는 악순환이 거듭될수록 궁벽진 농촌과 가난한 어촌의 주민들은 민주주의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보상금이라도 몇 푼 받아 도시에 사는 자식들에게라도 보탬이 되도록 하자”는 정치적 무기력과 패배감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것을 두고 “보상금에 눈이 어두운 지역주민들의 이기주의” 운운하고 냉소의 시선을 보내는 것은 문제의 본말을 완전히 전도시킨 것이다.) 만약 전문가들의 일방적 독주에 반기를 드는 주민이 있다면, 그는 여지없이 국가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비국민’의 낙인이 찍혀 버리거나, 엄청난 협박과 회유에 시달리고, 결국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개인의 양심을 지킬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로 짓밟혀 버린다. 이것은 일본이든 한국이든, 원전이 존재하는 모든 나라들의 공통된 관행이자, 국가-기업-전문가 체제의 상투적인 수법이다. 이러한 차별과 전문가주의, 자유로운 의사개진과 토론에 대한 원천적 차단은 원자력발전이 민주주의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독재체제의 한 축임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단언컨대 원전이 있는 한 그 사회는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번 일본의 원전 폭발은 한 마디로 비민주적인 국가-기업-전문가 독재체제의 붕괴의 시작을 예고하는 세계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의미를 얼마나 정확히 파악하고, 그 독재체제를 넘어설 수 있는 준비를 풀뿌리 시민들 스스로 얼마나 철저히 해 나가느냐에 따라 이후의 향배가 좌우될 수 있다는 데 있을 것이다. 

  한국, 가장 공격적인 핵개발 국가 중 하나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한 페이지 한 페이지에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며 다카기 박사가 증언(예언)해 놓은 모든 내용들이 지금 일본의 상황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와 신문 지면에서 현재진행형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이루 말하기 어려운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딘가에서 반드시 여러분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고 했던 다카기 박사가 지금의 사태를 보고 있다면 과연 무슨 생각을 할지…

  왜 나는 이번 사태와 다카기 박사의 유언 앞에서 안타까움과 함께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일까? 그것은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지금 내가 속한 한국사회가 이 대재앙을 우리 자신의 문제로 철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지금 세계적으로도 가장 공격적인 핵개발 국가 중 하나이다. 이미 이 좁은 땅 위에 21기의 원전이 가동중이다. 또 한국사회는 사용연한에 도달한 원전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두려움을 갖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돈벌이를 위해 아랍에미리트(UAE) 등에 원전을 수출하기 위해 혈안이 된 정부를 용인하고 있는 사회가 아닌가?

  지금의 일본 사태를 접하고도 한국의 정부와 원자력 개발세력들은 “일본의 원전과 한국의 원전은 설계부터 다르다”, “한국은 일본과 같은 지진위험지대가 아니므로 안전하다” 같은 어설프고 구차스런 핑계를 대며 문제의 핵심을 비켜가려 하고 있다. 방사능 오염에 대한 시민들의 정당한 우려에 대해서도 ‘편서풍’ 운운하며, 심지어 ‘유언비어’에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식의 입막음과 협박으로 일관하고 있다. 

  우리 자신의 생존과 미래 세대의 안전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면, 다카기 박사의 유언대로 “역사를 꿰뚫어보는 투철한 지혜와 대담하게 현실에 맞서는 활발한 행동력을 가지고 일각이라도 빨리 원자력시대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에는 생명과 안전에 대한 불감증에 빠져 있는 정치권력과 기업 및 전문가 세력을 우리가 더 이상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자각과 합의, 나아가 그러한 지배체제에 대한 대안을 만들어내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국가권력과 기업, ‘전문가’들에게 우리의 목숨과 미래세대의 안전을 ‘위임’하지 말고, 원전(에너지) 문제와 식품안전 및 농업 문제 등을 포함한 우리 삶의 근본문제들에 대해 풀뿌리 시민들 스스로 공부하고 탐구하는 ‘시민학습’의 네트워크를 일상 속에서 촘촘히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한 첫걸음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변홍철 칼럼 3]
변홍철 / 물레책방 인문학연구실장. 전 녹색평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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