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 반독재 민주화와 민족통일운동에 힘써 온 동암(東庵) 도혁택 선생이 끝내 '통일'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도혁택 선생은 10월 12일 오전 경북대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의 빈소는 경북대 장례식장에 마련됐으며, 장례식은 10월 14일 오전 10시 이 병원 장례식장에서 '민족통일장'으로 엄수된다. 장지는 '인혁당' 희생자들이 안장된 칠곡 '현대공원'으로 결정됐다. 고인은 그동안 대구시 칠곡에서 부인 이상순 여사와 함께 지냈으며, 슬하에 아들 영주씨와 딸 경원씨가 있다.
1932년 경주시 평동에서 태어난 고인은, 대구사범학교(현 대구교육대학)와 경북대 사범대학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1957년 무산고등학교(경주시 건천읍) 교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1960년 4.19혁명 당시 경북 봉화군 교원노조위원장과 교원노조경북연맹 홍보선전부장을 맡아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나섰고, 이듬 해 교원노조 활동으로 투옥돼 해직되면서 4년 만에 교직을 떠나게 된다. 이어, 1964년에는 이른 바 '1차 인민혁명당 사건'으로 투옥돼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이어, 80년대 이후 '통일운동'에 헌신했다. 1988년 <민자통(민족자주평화통일)대구경북회의> 창립에 참여해 '상임의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민자통중앙회의> 공동의장과 상임고문을 지냈다.
그리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민자통대구경북회의> 상임고문과 <범민련남측본부> 중앙위원,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고문, (사)대구경북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고문을 맡아 '통일운동'에 힘썼다. 지난 1995년에는 경북대 '4.9통일열사추모비' 건립사건으로 징역1년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국가보안법 위반)받기도 했다
또, 한문학에도 조애가 깊었던 고인은, 1964년 도서출판 '이문사' 대표를 지낸 것을 비롯해 '표준활용옥편', '고사성어사전', '명당지리정설', '가정의레백과'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남겼다.
'민족통일장'의 호상(護喪)을 맡은 민주화운동원로회 강창덕(84) 회장은 "도 선생은 한 마디로 '통일운동가'였다"며 "평생 꿈꾸던 통일을 끝내 못보고 떠나 슬프기 그지 없다"고 고인을 추모했다. 또 "4.19혁명 때부터 도 선생과 함께 투쟁하며 평생 동지로 지냈다"면서 "온화한 성품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분"이라고 기억했다. 강 회장은 "작년에 라경일 선생이 떠나고 올해 도 선생마저 떠나고...동지들을 자꾸 떠나는데 내 평생 통일을 볼 수 있을 지 모르겠다"며 슬픔을 가누지 못했다.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김두현 사무처장은 "늘 온화한 모습으로, 자기 주장을 하시기 보다 사람들의 말을 많이 들어주시던 분"이라며 "말씀은 별로 없으셔도 민족이나 시국 문제가 있을 때마다 꼬박꼬박 찾아주셨고, 특히 통일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셨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한편, 14일 엄수되는 '통일민주志士 동암(東庵) 도혁택 선생 민족통일장'에는 <민자통대구경북회의> 류근삼 의장과 < 6.15공동선언실천 대구경북본부> 박정우 상임대표를 비롯한 11명의 '장례위원장'과 200여명의 시민사회.재야 인사가 장례위원으로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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