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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과 사람
[김민남 칼럼] 『땅과 정의』(김윤상 | 한티재 | 2011)를 읽고
2012년 06월 10일 (일) 15:40:33 평화뉴스 pnnews@pn.or.kr

『땅과 정의』를 읽고 ‘아름다움’을 체험했다는 그런 기분에 젖는다. 글이 전하는 메시지가 좋아서도 그렇지만 물음이 있을 곳에 어김없이 물음을 묻는 글 구성의 문법에 매료되어 더욱 그러하다.

정의의 계산법을 사용하여, 자산이 아닌 경작하고 거주하는 땅을 얻고 人才가 아닌 삶의 터를 가꾸는 人材를 얻는다. 자산과 人才는 불로소득을 챙기려는 ‘특권층’ 사람의 관심사일 뿐인데, 그 관심사를 인간자연에 속하는 욕망이라고 혹은 모두를 잘 살게 해주는 경제발전의 동력이라고 이리저리 돌려 하는 말에 맞장구치는 세태, 그 세태의 잘못된 인식과 관행, 즉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것만으로도 그 땅과 그 人材를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으니 고정관념이라고 할 터인데, 고정관념을 깨트리기는 쉽지 않다.

자연의 것은 자연에게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 돌려준다. 자연의 것은 보전하고 인간의 것 가운데 다른 사람의 것은 탐하지 않고, 그리고 나의 것만을 취한다. 인간이 어떻게 자연의 것을 빼앗는지 알아내고 인간의 것에도 여럿이 이룬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오로지 자기가 흘린 땀만을 취한다. 정의의 계산법을 익히면 각자에게 돌아갈 응분의 몫을 정할 수 있다.

정의는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결단하는 것과 그것 아닌 다른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격려하는 과정 혹은 형식에 붙인 이름이다. 불로소득을 챙기지 않는다고 결단하는 것, 그 결단은 철학적 성찰을 동반하는 전인격을 거는 일이기에 ‘정의’라고 했을 것이다. 불로소득을 챙기지 않는 절제는 ‘한가함’이라는 보상을 얻는 일이기에 정의라고 했을 것이다. 각자에게 응분의 몫을 챙겨주는 계산법은 공부하지 않고는 익히지 못한다. 안락의자에서 하는 공부는 아니다. 세상에 관여하는 실천적 공부이다. 불노소득이 인간 삶의 길을 흐트려 놓기에 그것에 항의하자는 자신의 주장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면 받아들일 수 있는 부담임을 그리고 주장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스스로 헌신할 용의가 있음을 표명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고정관념을 깨는 세상사에 실천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왠만한 내공 없이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쩌면 내공을 쌓지 않은 주장이 고정관념을 뿌리 내리게 하는 서식처인지 모른다.
고정관념은 남이 편집해놓은 지식에 의해 관리되는 일상인데도 그 일상에 순응하는 관료화의 병이기도 하고, 또한 고정관념은 삶의 경험을 반성하여 앎을 얻는 학습능력의 상실이기도 하다. 학습능력의 상실, 그래서 교육의 문제는 우리 시대의 문제이다. 人材를 발견하는 문제이며, 人才의 특권이 사람도 지역도 중앙과 변방으로 가르는 분열이라는 것을 읽어내는 문제이다.
정의의 계산법은 연루된 모든 것을 하나씩 대입하여 버리고 취하기를 계속해 가는 조작operation의 과정이다. 그 과정을 거쳐 이러기 되는 종착점이 복지라는 가치이다. 복지는 정의의 계산법의 산물이지, 묻지마 식 퍼주기가 아니다. 복지는 실현의 로드맵을 그리는 정책을 필요로 하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정치적으로 타협하고 정치적 이유로 채택하고 폐기할  대상은 아니다.  그 사회의 복지 상태는 ‘삶의 현장’을 구성하는 그 사회의 지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 『땅과 정의』(김윤상 저 | 한티재 | 2011.12)
모순을 고정관념의 문제로 제기한다는 것, 어찌 보면 한가한 강단 개혁론자 같기도 하고, 그러나 문제를 도려내는 그의 칼 솜씨는 그냥 솜씨가 아니라 일자무식꾼도 읽고 삼킬 수 있게 요리해내는 마력이다. 그의 문장으로 세상을 읽으면, 누가 이 시점에 왜 그것을 말하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현실’의 자리에 서게 된다. 

『땅과 정의』에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곁들인다. 나에게 아름다움은 인격의 동일성을 표상한다. 인격의 동일성의 다른 이름이 소통이다. 언제 어디서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두고 소통이라고 하지 않는가? 사회성, 소통이야말로 존재의 근거이며, 또한 사람다움의 조건이다. 

‘아름답다’라는 말을 좋아하게 된 연유를 3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는  나의 부끄러움을 고백한다;

사회심리학자 콜벅의 단계와 계열stages and seqences을 죽을힘을 다해 읽었다.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해서 읽었는데 나로서는 도무지 따라 갈 수 없는 160쪽이나 되는 논문체 글이었다. 문자그대로 대충 이해했다; 100년의 인간발달 연구 과정과 성과를 비판적으로 정리하며 그것을 근거로 이후 인간발달에 대한 관심의 지남을 제시했구나. 인간의 불가역 변화를 연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 아니고는 인간연구라고 할 수는 없다고 자신의 연구방법론을 옹호하는구나. 후학들에게 연구방법론을 검색하는 성가신 짐을 들어주었구나.

몇 년이나 흘렀나, 젊은 심리학도 셀만은 콜벅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었다; ‘단계와 계열을 읽고 그 아름다움에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외경의 미학은 어디서 왔는가? 단계와 계열의 대하 같은 웅장함에서 왔는가? 담대한 물음을 가지고 길을 나서 끝내 구하고자 하는 답을 얻는 ‘완결성’ 경험, 앎의 경작에 경탄했는가? 단계와 계열의 완결성을 자기화할 수 있는 자신의 균형감각에 놀람을 토해낸 것인가? 셀만과 콜벅은 완결성 경험을 나누어가진다. 그들은 홀로 독특하면서 서로 의지한다. 사회성, 소통은 홀로 서며 연대하는 인간 삶의 방식이다.
  
아름다움은 쓸모를 구하려는 관심에서 빗어진 조급증과는 동떨어진 무관심, 한가함이 만들어낸 미학일 것이다.

『땅과 정의』에 담긴 글들은 하나하나 완결의 경험을 제공한다. 전체를 모아도 완결의 경험이 되고 글 하나하나도 완결의 경험이다. 그는 물음을 가지고 있고 답을 구하는 완결의 경험과 경험의 연계성을 편집했다. 완결성 경험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정보 지식이다. 나는 이제 다음의 문장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판결로서 세상을 말한다. 수업으로 세상을 말한다. 치료로 세상을 말한다. 판결이 지성이고 수업이 지성이고 치료가 지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완결과 연계는 교육의 원리이다. 그 원리라면 교육활동을 규제하기에 충분하다.  

불로소득은 특권층의 죄목이기도 하지만, 또한 알게 모르게 고정관념에 감염되어 있는 우리들이 그들의 짓을 거들고 있다. 아마도 그는 그들의 죄를 거들고 나서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글을 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체계를 가진 미래 사회의 발전 프로그램을 제시하기보다는,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방법론을 정교하게 다듬는 ‘자유주의자’로 처신하고 있을 것이다.
 
경작과 人材를 조망하는 눈높이(이론)를 가늠하고, 그 눈높이로 세상살이의 갈등을 촘촘이 쟁점화(운동)하고, 뜻을 모아 함께 행동(정치)하는 것만이, 요컨대 일관되고 지속적인 체계적 관여만이 고정관념을 해체시킨다. 그는 한가함을 즐긴다고 하는데, 실은 정중동의 내공을 쌓는 고통을 참고 있을 것이다.

그 이래, 나의 생은 부끄러움을 거두는 내심의 노력이다. 부끄러움은 금전 보다, 권세 보다, 명예 보다 더 큰 권력임을 알아가는, 종착점이 안 보이는 과정이다.

어떤 친구는 그를 뛰어난 人才라고 하지만 나는 싫증나지 않는 이야기꾼 人材라고 그를 묘사한다.

서평이 아니다. 독후감도 아니다. 그의 칼 솜씨에서 얻은 상상력의 고마움을 적은 나의 비망록이다.

   





[김민남 칼럼 23]
김민남 / 교육학자. 경북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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