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는 과거의 도시다. 20세기 이전의 관념과 태도가 도시를 지배하고 있다. 대구에서 새로운 상상력으로 도시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좌파로 내몰리거나 경계 대상의 불온한 사람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대구에서는 박정희와 이명박의 좌표를 넘어선 어떠한 가치와 대안도 수용되지 않는다.
박정희는 국가주의 발전론자이다. 이명박은 신자유주의를 신봉한다. 박정희의 국가주의와 이명박의 신자유주의는 대구에서 ‘악성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여기에서 ‘악성적’이라는 수사어가 필요한 것은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는 그 자체로 전혀 공통의 맥락을 가지지 못한 상극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데 비해, 신자유주의는 시장에서 국가의 개입을 전면적으로 거부한다.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대구에서 이화수정(異化受精)하여 퇴행적 역사를 만들고 있다.
국가주의는 시민 사회를 억압하는 기제를 가지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공동체 규범을 파괴한다. 대구에서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가 악성적으로 결합하여 시민사회의 역동성을 질식시키고 동시에 호혜적 공동체 규범을 억압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국가주의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에 의해 남용되는 경향을 가진다. 신자유주의는 모든 것을 시장에 맡겨서 결국은 자본이 세상을 지배하도록 한다. 국가 권력이 남용되고 자본의 지배가 극대화되면 힘없고 가난한 사람은 살기 힘들어 진다.
대구에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많다. 전국에서 경제적 수준이 가장 낮은 도시이다. 그런데 대구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박근혜에게 무한한 정치적 신뢰를 보내고 있다.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에게 불리하게 작동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이 국가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대변하는 박근혜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는 역설이 대구에서 벌어지고 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네이션(nation)의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사람들은 네이션에 초월적 성격을 부여하고 구원을 요청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에 따르면 상상의 공동체는 종교나 왕조와 같은 전(前) 근대사회를 지배한 문화적 맥락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현실에서 고통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네이션을 통해 구원받는 꿈을 꾸게 된다. 사람들은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어 좌절할 때 국가를 상상의 공동체로서 네이션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힘없고 가난한 대구의 사람들은 박근혜를 통해서 네이션의 환상을 갈구하고 있다.
보로메오 매듭이라는 비유를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설명한 사람은 가라타니 고진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가 국가-자본-네이션의 보로메오 매듭의 구조로 견고한 틀을 형성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국가 권력과 자본의 지배력과 상상의 공동체에 대한 환상이 교묘하게 결합되어 자본주의의 불안정한 사회적 구조가 형성된다. 대구는 가라타니 고진이 개념화한 국가-자본-네이션의 보로메오 매듭이 가장 극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곳이다.
박정희 국가주의와 이명박 신자유주의의 악성적 결합은 박근혜의 등장으로 국가-자본-네이션의 보로메오 매듭의 완결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대구는 박정희-이명박-박근혜의 보로메오 매듭에 의해 결박되고 있다. 박정희는 국가를, 이명박은 자본을, 박근혜는 네이션을 각각 상징한다.
대구의 탈근대화 전략의 핵심은 박정희-이명박-박근혜의 보로메오 매듭을 푸는 일이 되어야 한다. 대구가 박정희-이명박-박근혜의 보로메오 매듭을 풀어 탈근대화 전략을 성공시키지 못하는 한 대구는 과거의 도시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보로메오 매듭은 매우 정교하게 연결되어 생각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다.
지금 정치의 계절의 한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권 창출로 이 문제를 풀 수 있으리라 의욕을 보이고 있다. 국가 권력을 통해 보로메오 매듭을 풀고자 한 어떠한 시도도 가장 기만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는 역사적인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현재 대구시가 추진하듯이 메가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자본 유입을 가속화시킨다고 해서 보로메오 매듭은 풀리지 않는 것 또한 명백하다. 자본은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스스로 긍휼하게 여겨 도움을 주지 않는다. 메시아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오지 않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현재의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미 그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가라타니 고진이 보로메오 매듭을 풀기 위한 방안으로 규제적 이념으로서 공동체적 사회에 대한 상상력의 회복을 이야기한 것을 비유적인 수사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를 위한 실천적인 고민과 함께 적절한 전략적인 지점을 확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동체적 사회는 사람 상호간의 호혜적 관계가 작동하는 곳이다. 가라타니 고진은 공동체를 통해 국가주의를 극복하고, 자본의 횡포를 함께 막아내는 힘을 가지고, 상상에서가 아닌 현실에서 공동체적 유대감을 실천할 때 보로메오 매듭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시민사회의 임파워먼트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공동체 규범의 확산을 위한 작은 실천이 거창한 정치적 기획보다 혹은 수조원의 중앙정부 예산을 확보하는 것보다 의미가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사회적 경제에 대한 지역적 기반을 확대하는 일이 현재 대구에서 그 어떤 현실적 사안보다도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도 사실상 이 때문이다. 탈근대화는 근대화 전략으로 달성할 수 없다. 박정희, 이명박, 박근혜를 넘어서는 담대한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김영철 칼럼] 29
김영철 / 계명대 경제금융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kimyc@kmu.ac.kr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