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나쁜 고전『군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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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칼럼] 믿음을 팽개쳐버린 정치인이 오래 서있을 땅은 없다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이다. 하지만, 약을 잘못 먹으면 독이 되듯이 책 중에도 잘못 읽으면 독이 되는 책이 있다. 고전도 그렇다. 어떤 고전은 전혀 유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읽는 이를 곤경에 빠뜨리는 경우가 많다.

 가령 역사 속의 바람둥이로 이름난 카사노바의 자서전에 감명을 받아 그런 행위를 답습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독약을 먹은 셈이다. 1960년대에 무려 70여명의 여자를 상대로 혼인빙자간음 사건을 일으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인수라는 바람둥이가 있었다. 그는 아마도 카사노바를 읽고, 그를 롤 모델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다. 히틀러의『나의투쟁』도 나쁜 고전이다. 만약에 히틀러를 읽고 그를 모방하려드는 정치인들이 많이 나온다면 세상은 조용할 날이 없을 것이 뻔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거나 ‘책은 도끼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훌륭한 글과 좋은 책은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졌다. 그러나 나쁜 책은 독자를 망치고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글이나 책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겠고, 그것을 읽는 사람의 마음 밭이 잘못 된 탓에 독이 든 열매를 맺는 경우도 있겠다.

 마키아벨리가 쓴『군주론』이라는 좀 특이한 고전이 요즘 사람들의 입에 부쩍 오르내리고 있다.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유명한 말을 탄생시킨 이 책은 이상적인 정치를 지향하는 대부분의 정치관련 저서와는 달리, 군주의 무자비한 권모술수를 당연시하는 내용을 담은 유별난 책이다. 끊임없는 논란 속에서도 그 생명력이 시들지 않고 있는 것도 특이하고, 심지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처세서로도 인기가 높다.

 『군주론』의 주장 가운데는 군주는 때로는 무서운 사자가 되고, 때로는 교활한 여우가 되어야 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군주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정당하지 않는 방법을 쓸 수도 있고, 강하면서도 교활해야 한다는 주장도 편다. 현명한 군주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유리하지 않을 때는 약속을 지켜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 주장의 근거는 인간은 악하며, 매우 단순하고 눈앞의 필요에 목매달기 일쑤이기 때문에 구태여 그들과 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마키아벨리는 잡다하고 때로는 교활한 인간들을 통치하려면 통치자 자신이 더 악하고 교활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는 몇몇 대표적인 말썽꾼들을 시범적으로 단호히 처벌함으로써 경종을 울리는 것이 통치의 기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의 말을 빌자면 바로 공안정치다.

 이런 이론이 요즘 새삼스레 회자되는 것은 우리의 시대상황과 맞물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저런 핑계로 약속을 마구 파기하고,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타도해야할 적으로 간주해버리는 정치풍토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부의 윗자리에 앉은 어떤 권력자가 마키아벨리를 읽고 무릎을 탁치면서 공감의 함성을 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오늘의 정치상황이다.

 그러나 2013년 오늘에 새삼 마키아벨리즘을 떠 올리게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썼던 5백여년 전의 이탈리아는 여러 도시정부가 난립하여 제대로 된 국가가 형성되지 못한 혼란기였다. 따라서 마키아벨리가 혼란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군주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은 어쩌면 현실정치라는 입장에서 이해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군주가 통치하는 왕정시대가 아니다. 아직도 그렇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은 시민시대라 할 만큼 사회엘리트층의 시민의식이 깨어있다. 피땀 흘려 이룩한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긍지가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 조지 오웰이『1984년』에서 걱정했던 빅브라더의 가공할 감시망은 이제 대중의 소통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대중이 오히려 빅브라더를 감시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일부 정치인들과 양의 탈을 쓴 언론매체들의 억지논리가 잠깐 통하는 듯도 하지만, 결코 오래 갈 수는 없다. 역사는 발전한다는 명제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마키아벨리의 망령이 지금 이 땅에서 부활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견 쯤은 할 수 있다. 믿음을 깡그리 팽개쳐버린 정치와 정치인이 오래 버티고 서있을 땅은 없다.






[김상태 칼럼] 22
김상태 / 언론인. 전 영남일보 사장.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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