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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선을 벗고 춤을 춘다
김민남 / "일다운 일을 하는 세상, 어떻게 만들까"
2013년 12월 31일 (화) 16:46:37 평화뉴스 pnnews@pn.or.kr
             
(자신을 거리의 춤꾼이라고 소개하는 ‘춤꾼 박정희’의 사람사는 이야기를 옮겨 적었습니다.)
자유롭고 싶어서 춤을 춘다. 자유를 표현하는 내 속에 들어 있는 능력을 이것저것 찾아보니 춤추는 것, 그 이외에 다른 것이 없더라고요. 춤 선생님을 찾아가 춤을 배우고 익혔지만, 이게 춤이야, 왜 이리 즐겁지 않아, 몸과 마음을 옥죄어야 춤이 되나, 갈수록 회의만 쌓이고. 춤은 원래 즐겁지도 않고 자유롭지도 않은 그런 것인가. 선생님한테 물었어요, 춤을 꼭 이렇게 사뿐사뿐 알토란 같이 추어야 하나요.
‘정해진 대로 춰야 해, 잔말 말고.’ 언제 누가 이렇게 딱 정해 놓았어요. ‘그게 원칙이야. 그 원칙을 벗어나고서는 춤 무대에 설 자리가 없어. 시키는 대로 익혀.’
그런데 그게 오히려 춤추는 무대를 좁혀놓더라고요. 춤꾼들 사이에 무대를 향한 치열한 눈치 싸움이 춤을 이렇게 추게 하는 구나 싶었어요. 꼭 이렇게 해야 춤이라고 고집하는 것을 두고 원칙을 지킨다고 할 수는 없지요. 꼭 이렇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어찌 사회를 만들고 창조를 낳겠어요. 이렇게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도록 허용하는 곳에 소통도 있고 새로움도 있겠지요.

춤에 원칙이 있다면, 춤을 춤답게 추려는 내심의 충동이 원칙이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춤이 되는지 늘 내 속에서 묻고 있는 나의 자아를 담금질 하는 것, 그게 원칙이지. 표현하고 싶은 충동, 내 속의 슬픔 희열 분노 열망을 드러내 표현하고 싶은 충동, 그 예술적 충동은 다른 이들과 함께하려는 ‘사회성’의 발로일 뿐, 뭐 대단한 것이라고. 군더더기가 없는 순정한 절정의 경험, 예술적 경험은 누구에게도 통한다. 그것 앞에 누구든 계급장을 내려놓는다. 최고의 경지를 관능적, 몸의 떨림이라고 말한 것이 그런 뜻이겠지요. 몸의 떨림이 최고의 소통, 사회적인 것의 온전한 형태라는 뜻이겠지요. 예술적 표현, 남김없이 온전히 나누는 인간적 방식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춤을 춥니다.

한국무용이 어째서 전통의 계승이어야 하는가. 그렇다고 해도, 전통이 손짓과 발짓의 매뉴얼로 계승되는가. 춤의 적통이 매뉴얼로 이어지는가. 한국무용은 관치가 되었어요. 한국무용만이 아닐거예요.

나에게 춤은 평생학습입니다. 자유는 저항에서 오고 저항은 함께하는 장을 만들며 희망이 된다는 것을 어제 보다 오늘 더 진하게 의식합니다. 함께 하는 장이어야지 하는, 구속감이 창조의 힘이라는 것을, 예술혼의 샘이라는 것을 오늘 다시 깨닫고 있습니다.

밥 먹고 살아야지예. 그런데 밥 먹고 살려고 하니 을이 되어야 하더라고요. 그런데 요새는 을의 처신을 즐겁게 해요. 관과 교섭하며 짐짓 저자세가 되는 것도, 노인복지센터에서 굳은 몸 풀기용 춤을 추는 것도, 하나도 싫지 않아요. 내가 춤꾼이라는 것 보다 위에 둘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예술은 자유의 특권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유쾌한’ 욕설이 내 춤의 구성입니다. 내 욕설이 서로 상쾌함을 나누는 해학이고 싶어요. 그게 내 자리에서 내 할 짓을 하게 하는 바탕이고 싶어요. 백두대간을 휘몰아치는 겨울바람을 유쾌한 욕설로 춤을 춥니다. 거창하게 춤추지 않아요. 대구의 불쾌한 여름햇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내가 대구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대구를 바꾸려면 대구에게 전달할 것이 많아야 하겠지요. 주지도 않고 뭘 그리 바라는 것은 많은지. 춤꾼이니 춤으로 대구에 줄 것을 열심히 구하고 있습니다.

버선을 벗고 춤을 추는 사람들 속에 나도 거기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무용계에서 추방된 사람들, 번듯한 무대를 잃은 사람들, 맨발로 거리에서 빗어내는 춤의 힘,  원초적 본능의 힘으로 대구의 기를 살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


하느님도 내 자리에서 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을 축복한다. 하느님의 축복은 흔전만전 늘려 있다. 누가 따 먹을지 아무도 모른다. 축복은 행운으로 존재한다. 행운은 겉으로 보아 우연이지만 속으로는 필연의 법칙을 따른다. 스스로 구하는 사람만이 그 법을 알고 그 법을 준수한다. 축복은 하느님의 것이고 나머지는 인간의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하느님이 허락한 인간다움을 지키는 자, 그는 자기 자리에서 자기 일을 하는 일꾼이다. 거리에 나가 춤을 추든지, 제 흥에 겨워 추는 춤마저도 훼방 놓는 세상을 향해 벽보고 주먹이라도 휘두르든지.
내일 하리라고 미루지 말고, 결정적 순간에 나서리라고 쪼잔한 야단 떨지 말고. 누가 내일을 아는가. 하물며 결정적 순간을 어떻게 아는가?

성질대로 하는 짓이야 누군들 못하겠는가. 성질을 죽이고 내 할 일을 장만하는 것이다. 그게 인격이다. 인격이 뭐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격을 모험의 장에 습관처럼 자기를 내던지는 행동이라고 말하는 철학자도 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면, 그렇다면 내 속에 들어 있는 ‘욕망할 만한 것’을 드러내어 행해야 하겠지. ‘욕망’을 드러내지 말고. 욕망을 드러내면 억지가 나오거든요. ‘훌륭한 사람은 없다. 단지 훌륭한 관계가 있을 뿐’이라는 믿음 하나로 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내 일을 쭈빗거리지 않고 하는 것이다.

인간답게, 품격을 갖추고 싶다. 나도 내 기질대로 살지 않고 한가롭게 살고 싶다. 선택하고 싶다. 성질대로 하고 싶지 않다. 나도 그 사람의 자리에 서서 나도 아주 낮은 자리에 서서 세상을 보고 싶다. 민주주의를 밥 먹여 준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민주주의는 식지 않는 나의 상상력에 실려 내 앞에 나타난다고 믿는 사람의 것이다.

모험하는 자아, 그 모험 앞에 정해진 의미는 없고 그 의미의 실체도 없다. 만드는 것이고 고치는 것만이 존재한다.

일다운 일이 무엇이며, 일다운 일을 하는 세상을 어떻게 만드는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새해가 되었으면 싶다.

   





[김민남 칼럼 31]
김민남 / 교육학자. 경북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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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114.XXX.XXX.176)
2014-07-09 20:05:50
건의
정/­선/­카/­지/­노/는 이제그만 로­또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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