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을 바쳐 일한 대구활동가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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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남 칼럼] 시민을 얻지 못하는 시민운동,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가?


‘개혁을 외쳤지만 불행히도 개혁집단은 대중을 가지지 못했다. 그 결과 저들은 아주 간단한 상징 조작만으로 개혁집단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끝내는 제거해버린다.’ 프레이리 책에서 읽었다. 지금 우리가 그 지경에 처했다.

대중(시민이라고 해도 되고 민중이라고 해도 된다)의 편에서 사고하고 행동한다고 자부했지만, 그런데 우리는 그 대중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데 실패했다. 오히려 저들이 대중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대중주의자’들이 되었다. 우리의 ‘가벼운’ 저항이 저들의 오만을 불러들였다고 자책한다.

대구참여연대를 방문했다. 회원들과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자리라고 하여 다소간 무거운 마음으로 방문했다.
회원들과 나누었으면 하는 이야기를 미리 준비하면서, 활동상황도 살피고 활동가들을 만나 고충을 듣기도 했다. 그들과 미래를 이야기하는 자리인데도 희망을 짓는  적합한 낱말을 찾아낼 수 없었다.
10년 한 우물을 파면 거기에 먹을 것이 나오고 이름도 새겨진다고 하는데, 20년 청춘을 바치고도 제 몸 하나 간수할 변변한 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한 대구 활동가들에게 무슨 말을 한들 미래가 되고 희망이 될 수 있겠는가.

왜 변죽만 울렸을까?

참석자 한 분이 질문을 했다. 그리 헌신했는데 ‘활동가 신분(증)’을 받아주는 사람이 왜 그렇게도 귀한가요?

한 우물을 놓쳐버린 게 아닌지. 서울은 있는 자리에서 파기만 하면 값나가는 것을 캘 수 곳이지만, 대구는 파야할 자리조차도 찾아내기 난감한 그런 척박한 곳인데, 그런데도 여기저기 뒤지기만 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그런 것 아닌지, 왜 그랬을까요? 왜 중심을 치고 들어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변죽만 울리고 다녔을까요?

사회적 기업을 이끌고 있는 어떤 분은 대구 활동가들의 난감한 처지를 이렇게 이해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시절 진보의 의제들이 다 소진됐다, 성과도 없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을 만한 의제가 없어졌다. 의제 없음이 뿌리뽑힘과 같은 효과로 나타났다. 그래서 그런지 권력감시라는 조직의 설립취지마저도 잊은 것 같다. 이즈음 풀뿌리 정치에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제도권 진입에 관심을 보이는 것도 그 일환이라는 생각이 든다. 패배주의가 아닌 당당한 이유를 가지고 풀뿌리 정치에 참여했으면 좋겠다.’

김정금(대구참학 정책실장)은 시야를 넓혀 ‘서울따라 하기’라는 대구의 특수한 인습적 관행이 불러온 필연적 결과라고 했다.

대구운동단체들은 중앙의 ‘지부’로 자신들의 위상을 설정한다. 그들이 대구 현안을 적시하고 돌파할 전략을 숙고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지역교육청도 중앙의 지침에 따라 움직이는 하부조직일 뿐이고, 교육현장인 학교마저도 관료조직의 말단처럼 사고하고 행동한다.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학교에 교육이 일어나게 하는 일인데, 정작 교육을 책임진다고 자부하는 사람들한테서 그 일을 고민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없다.

대구에 살면 누구나 중심을 비켜나 주변만 맴돌게 되어 있다.
대구에 살면 누구나 그렇다? 그런가?

경북대 입학 사정관직을 미련 없이 던져버린 어느 전직 입학사정관은 대구에서 이상을 추구하며 살기는 어렵다고, ‘직장기득권자’의 횡포를 이렇게 증언한다.

국립대라고 그런지 아무튼 교직원은 ‘위계와 자리를 관리하는’ 의식과 행태가 습벽으로 고착되어 있다. 도무지 꿈쩍하지 않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면서도 냉소하고 비아냥거리는 행태는 그 대학의 인격이 되어 있다. 사정관은 저들의 휘하에서 관리되어야 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언론기고나 전화 인터뷰하는 것도 사전에 허락받고 하도록 요구하고 신문에 글쓰기 하는 것도 검열하는 지경이다. 더 놀랍게도 교수들의 신화와 같은 퇴행적 통념을 마주 하면 숨이 막힌다......수능의 객관성 담론에 매몰되어 있고 일반지능 맹신과 수성구 신화가 그들의 관념 속에 진실로 밖혀 있다.

치고 들어갈 중심, 공동의 의제


여기 대구는 문자그대로 중앙의 ‘지부’가 되었다. 운동이건 관변단체이건 관청이건 사회기관이건, 스스로 중앙의 지부가 되었고 지부로 처신했다. 중앙이 내려준 지침, 중앙이 편집해준 지식, 중앙이 파견한 에이전트에 의해 관리되고 있는 대구의 삶의 모습이다. 중앙의 위력이 대구의 삶 구석구석에 퍼져 있다.

시민활동가들도 그리고 이른바 지도층도 시민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중앙’만 가지려고 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대중을 얻자는 것, 뿌리를 내리자는 것,
대구에 살며 대구에 뿌리를 내리지 않았다.
대구사회 ‘속에’ 있지도 않았고 ‘더불어’ 있지도 않았다. 당연히 참여자 의식도 없고 동반자 의식도 없다.

어떻게 뿌리를 내리는가?
치고 들어갈 중심, 공동의 문제(의제)를 설정하자.
청년실업이다. 일할 권리를 찾는다. 청년 실업의 문제에 집중하여 일할 권리의 쟁취가 얼마나 절박한지를 체감하며, 그럴수록 일할 권리는 이론의 문제, 운동의 문제, 정치의 문제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하나의 문제로 뭉쳐서 말하면, 일할 권리는 일다운 일을 만들어내는 사회정책에 의해 실현된다.
덧붙여 ‘직장나눔’이라는 담대한 희망을 전파하는 ‘지식인’ 역할이 요청된다.
난점은 (지방)정부로 하여금 사회정책을 입안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밑으로부터의 힘이 있을까?
밑으로부터의 힘을 모우는 일은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몫이다. 활동가들에게 활동의 폭과 깊이는 직장나눔의 희망을 전파하는 지식인과의 연대에서 결정될 것이다.
(김재경은 자신의 경험을 빌려, 일다운 일을 만들어내는 작업은 ‘직장기득권자들’에게 맡기면 절대 안 된다고 충고한다. 여기 대구에서(한국에서) 안정된 직장 그자체가 폭력적 권력이 되어 있다고 귀뜸해 준다.)

이 연대의 가능성은 의제를 진술하는 방식에 달렸다.
풀지 못할 문제는 없다. 절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문제로 확정한다. 문제를 확정한다는 것은 그 안에 풀 수 있는 방법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를 확정하고 그 문제를 풀어내려고 고심할 수 있게 숙제 형태로 진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문제는 좌의 도(중심)를 따르고 있어야 하고 그리고 우의 기(동의)에 적합한 해법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김윤상의 좌도우기론을 빌리고 있다).
도대체 그런 문제는 어떤 것이기에 좌의 도이고 우의 기인가? 혹은 중심이고 동의할 수 있는 해법인가? 그럴 수 있는 조건을 충족하는 문제라면 공동의 관심사(모두의 걱정거리) 같은 것이라고 일단 말해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렇다; 아이들의 유능과 성실을 추궁하기 보다는 어른의 책임을 따져 물어야 한다. 교조는 이것이 오늘 풀어야 할 한국의 시대적 교육문제임을 ‘소리치며 들고 일어났다’, 들고 일어났기에 전교조 자체가 한국의 사회정치 문제가 되었다. 시대의 흐름을 직시하는 당대 좌와 우 모든 성인세대는 아이들 속과 밖의 학습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그 아이의 최대치 능력을 키우는 교육시스템 구축에 동조했다. 이후 문제해결의 논리를 벗어나면서 문제의 문제성을 상실해버렸다. 풀면 한쪽이 죽어야 하는 교육문제가 되어버렸다. 전교조는 죽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당연히 교육문제도 같이 죽어야 한다. 누구의 잘못일까? 교육문제를 풀어야 하는 자리에 더 가깝게 앉아 있는 자들에게 더 큰 잘못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전교조가 엄연한 사회정치 문제인데, 존재 자체를 없애는 방식으로 그 문제를 풀어낸다는 발상은 놀랍다.

대중을 떠나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옳은 입장을 견지하려는 노력보다는 차라리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더라도 대중과 함께 하는 위험을 선택하겠다(‘인생이 학교이다’에서).

지성의 힘에 대한 신뢰

대중과 함께 하려면 대중이 원하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
자기는 아는 게 많지 않다고 몸을 낮추는 어떤 지인은 이렇게 소리를 높인다.
‘그렇다’ 라고 무릎을 칠만한 성장 동력을 내 놓아야 한다. 민주화니 진보니 하는 용어를 더 이상 쓰지 말고. 경제를 넘어 서서 공동체를 말하기 위해, 일의 권리, 일자리 대책을 내 놓아야 한다. 그게 성장 동력이라고 외쳐야 한다. 일자리 청을 대구에, 각 지역에 만든다는 대책, 그것에 덧붙여 아프리카, 남미, 동남아 등등에도 일자리 청을 만든다고 하면 어떤가? 그 쪽 나라에는 진정성 있는 사회개발 봉사(단순한 한국어, 한국문화 전파 봉사가 아니고)가 되고 한국청년들에게는 도전의 기회가 되는 프로그램과 함께.

진보를 자처하는 어떤 교수 한분은 일자리는 보수의 단골 메뉴이며 일자리를 말할수록 보수의 전략에 말려든다고 조심하라고 했다. 

이렇게 조심하자.
대중과 함께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대중과 배움을 나누는 일, 서로를 대상화하여 비판하는 일을 한다는 것이다. 상호배움, 비판이 대중과 함께하는 것을 지속가능케 하는 시스템으로 작용할 것이다.

비애와 무시와 모욕을 이제 지식으로 갈무리해야 한다. 그 지성의 힘에 대한 신뢰 없이는 변죽을 울리지 않고 중심을 치는 행동을 향한 사회적 합의도 없다. 지성의 힘에 대한 신뢰는, 누가 어떻게 보더라도 그게 문제라고 인정하는 것을 문제로 진술하고 그 문제를 같이 숙의 하여 풀자고 하는데 주저할 사람은 없다는 낙관론(지성의 힘에 대한 신뢰)에 근거하고 있다.






[김민남 칼럼 30]
김민남 / 교육학자. 경북대 교육학과 명예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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