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원하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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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 "선택이 존중되고 모든 것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자율적인 사회를"


2013년 한 해가 저문다. 되돌아보자.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안녕했는지. 한마디로 결코 안녕하지 못했다. 지난 1년 한국사회를 설명하는 단어는 ‘정치 실종’이다. 실종된 정치의 자리를 불통, 독선, 공안몰이가 차지했다. 정치가 사라지자 우리사회가 다급하게 해결해야 할 정치적 의제는 사라지고 이곳저곳에 온통 상처투성이만 남았다.

이곳에서는 4대강 사업이 남긴 생태적 재앙, 신자유주의의 유산인 불평등과 빈곤의 악화, 반복되는 민주주의의 후퇴, 연대와 협력이 단절된 인간관계의 추락으로 인간의 행동이 극단으로 치닫고, 저곳에서는 일본의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 수산물 수입 문제,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문제, 밀양 송전탑 사태, 국가정보원을 포함한 여러 정부기관의 불법 대선 개입 문제, 철도노조 파업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응 등으로 우리사회의 분열과 갈등의 골이 깊어만 간다. 소통과 통합은 실종된 지 이미 오래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분노와 우울의 감정만 켜켜이 쌓여가고 있다.

세밑자락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노와 우울의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만 존재하는 사회가 되었다. 검은색과 흰색 중에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사회로 고착화되어 가고 있다. 말 그대로 ‘존재’와 ‘선택’이 강요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제도화된 강제, 즉 공권력이 일상적인 삶의 배경으로 녹아들어가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강제라고 의식하지 못하고 강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강제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이며 단조로울수록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일상이 깨어지거나 깨질 압력을 받게 되면 비로소 일상을 지탱해 온 강제가 눈에 들어온다. 강제 당한 대상들의 눈에 폭력의 특성들, 부당하고 정당화할 수 없고 변명의 여지가 없는 물리력의 특성들, 개인의 인격과 주권에 대한 비열한 공격들, 법과 원칙이라는 탈을 쓴 공권력의 폭력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때이다.

<한겨레> 2013년 12월 23일자 4면(민주노총에 첫 경찰투입) / 사진 설명. 끌려나가는 노조원 경찰이 파업과 관련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철도노조 지도부를 검거하겠다며 22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본부 사무실이 있는 경향신문사 건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를 막는 노조언들을 연행하고 있다.
<한겨레> 2013년 12월 23일자 4면(민주노총에 첫 경찰투입) / 사진 설명. 끌려나가는 노조원 경찰이 파업과 관련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철도노조 지도부를 검거하겠다며 22일 오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본부 사무실이 있는 경향신문사 건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이를 막는 노조언들을 연행하고 있다.

이때 우리의 일상은 무의미해지고 삶이 무력하게 된다. 원래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만들어내는 저수통이다. 사회는 인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살아 있는 신화, 무의미한 삶에 저항하며 의미를 창조하는 공간이다. 인간이 자신의 상징적인 세계, 즉 사회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자신의 끔찍한 운명을 부정하고 극복하려는 시도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것을. 사회를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존재는 천사나 짐승밖에 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갈파한 바 있다. 전자는 불멸의 존재이고, 후자는 자신이 사멸하는 존재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만이 유한하면서도 자신이 사멸하는 존재임을 인식하는 존재이다. 그만큼 사회는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때문에 사회는 홀로 살 수 없는 인간과 인간이 서로 합의하고 공유하는 행위의 다른 이름으로 작동하며, 합의되고 공유된 것이 존중되도록 만드는 권력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은 어떤가? 한국사회는 우리가 인간으로서의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분명한 방법, 확고하고 안정된 삶의 지향점, 고단한 삶의 여정에서 예측 가능한 목적지를 우리에게 전혀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우리에게 정신적인 우울증과 무력감,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는 느낌, 삶의 고난을 헤쳐 나가기에 부적절하다는 느낌만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불안과 불확실성이 지속적으로 증폭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각자가 깨닫는 것은 타인과 함께 함으로써 얻는 유일한 이득은 회복 불가능한 자신의 고독에서 살아남는 방법에 대한 조언과, 누구의 삶이든 삶은 맞서야 할 위험요소로 가득하고 홀로 싸워야 한다는 정도다. 법과 원칙을 내세운 공권력의 사용에 대해서도 각자의 인권을 존중하고, 즉 각자 자기 방식대로 살도록 내버려두고 아무런 방해받지 않고 살 수 있게 내버려두는 것으로만 이해할 뿐이다. 관용, 공감 그리고 연대의 가치가 제대로 숨을 쉴 수 없는 사회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세상을 원하는가? 우리가 원하는 사회는 ‘자율적인 사회’이다. 자율적인 사회야말로 진정 민주적인 사회이다. 각자의 선택과 결단이 자유로워야 하며 존중되는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는 미리 주어진 모든 것에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사회이다. 새로운 제반 의미를 창조하도록 해방하는 열린사회이다. 자율적인 사회에서만 모든 개인은 자신들의 삶을 위해서 그들이 하고자 하는 창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처한 여건을 통제할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체념하고 항복하게 된다면 더 이상 스스로 규정하고 운영하는 자율적인 사회는 유지될 수 없다. 그 결과 사회는 타율적인 사회가 된다. 타율적인 사회라는 배에 승선한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고 선박의 항해 일정을 자신들이 결정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게 된다. 이런 사회에서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인간 세상을 향한 모든 모험은 끝내 막을 내리고 만다.

갑오년 새해가 곧 다가온다. 120년 전 동학혁명의 모험을 우리는 뼛속 깊이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어떤 배에 승선할 것인가는 오직 우리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다. 2013년 내내 우리는 ‘대통령이 항상 옳다’는 강령에 따라 선악이 결정되는 전체주의 국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는 루소의 “사회계약론” 첫 구절처럼 자율과 타율은 동전의 양면이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은 지금과 같은 타율적인 사회가 아니라 권력이 시민에게 있고, 자유와 평등이 지배하는 자율적인 사회이어야 한다. 때문에 우리는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인간 세상을 향한 모험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쇠사슬에 묶인 노예적 삶을 거부한다면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자율적인 인간 세상의 모험에 나설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하여.






[이재성 칼럼 48]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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