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반성엔 본질을 비껴간 성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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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진 칼럼] 새정치민주연합, 민심의 바다에서 모든 적폐를 불사를 용기가 있는가


 7.30 재보궐선거 전 박영선 의원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촉구 집회에 참석하여 “저희들에게 힘을 보태주십시오.....저희 새정치민주연합이 조금 힘이 모자랍니다. 과반의석을 가진 거대공룡 정당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는 발언을 했다. 싸워야 할 때 싸우지 않고 선거를 앞두고 불쑥 집회에 찾아와서 도와달라며 표를 구걸한다며 집회참석자들로부터 비판이 쏟아졌다. 세월호 참사 이후 사건의 진상규명과 정부의 수습과 대응과정에 숱하게 쏟아지는 의혹에 대해 당 차원의 제대로 된 대응 한 번 하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지방선거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를 받아든 새정치민주연합은 국회의원 숫자 늘이기와 몸집불리기를 통해 하반기 정국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던 것이다.

 7.30 재보궐선거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참패했다. 국민들은 냉정했고 그들은 안일했다. 원인분석에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크게 이겨야 하는 선거에서 크게 졌다’는 평가는 동일한 것 같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또 다시 비상대책기구를 꾸렸다. 명칭을 국민공감혁신위원회로 정하고 원내대표인 박영선 의원이 위원장을 맡았다. 그런데 국민공감을 비상대책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새정치민주연합의 박영선 위원장이 지난 7일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와 세월호특별법 쟁점에 합의해 버렸다. 당내 소통도 유가족들의 동의도 구하지 않은 상황에서 박영선 위원장의 독단적인 결정이었다. 박영선 위원장의 ‘국민비호감’의 모습은 새정치민주연합이 왜 실패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경향신문> 2014년 8월 11일자 3면(사회)
<경향신문> 2014년 8월 11일자 3면(사회)

 박영선 위원장의 독단적인 합의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스스로의 결정과 판단에 대한 과신에 따른 오만이다. 박영선 위원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저는 처음부터 세월호 특별법의 핵심은 진상조사위원회에 있다고 봤다”고 했다. 내가 핵심을 파악했고 유가족들이 얘기하는 것은 애초부터 실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정도라도 합의한 것은 잘된 것이다라는 뉘앙스가 풍긴다. 박 위원장의 이런 전지적 시점은 당내 토론도 제대로 거치지 않고 유가족과 수백만 명 서명자들의 뜻을 무시한 처사였다. 충분히 귀담아 듣고 또 듣고 헤아리는 것이 정치인의 기본이다. 진퇴양난의 기로에서 협상할 것인가 투쟁할 것인가의 판단과 물음도 시민에서 기인해야 하는 것인데 박영선은 자신으로부터 시작했다. ‘민’이 주인인데 주인의 뜻을 위임받아 실행하는 자가 주인을 무시하고 주인의 뜻을 묻지도 않은 채 심지어 100명이 넘는 같은 대리인들의 의견도 묻지 않고 혼자 개선장군처럼 합의하고 온 것이다. 똑똑한 엘리트출신 정치인들이 때로 스스로의 명석한 두뇌를 국민의 뜻이라는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민심은 지능과 두뇌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늘 함께하며 듣고 보고 웃고 울고 하는 과정에서 쌓여가는 것이다.

 DJ의 민주당으로부터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으로 오기까지 선거패배에 따른 비상대책기구 구성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비상대책이든 국민공감이든 대외적으로는 ‘반성모드’를 보여주고, 내부적으로는 그 틈을 타 힘센 자들이 전열을 정비하여 당권을 잡기 위한 시간을 벌어준다. 때론 당대표와 대선후보 선출방법을 가지고 치열하게 싸운다. 자파 후보의 유불리를 발 빠르게 계산하고, 중앙과 지역에서 벌어지는 줄세우기와 권력투쟁의 과정은 추악한 정치의 이면을 보여주었다. 외부인사를 영입해 쓴소리를 듣고 토론을 통해 정리된 혁신방안은 캐비넷 속에 들어가서 유물로 만든다. 지금까지 생산된 혁신방안을 1년에 한가지 씩만 실천했어도 현재의 모양새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름을 붙이든 그들이 말로 한 혁신은 현재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임기응변’이었지, 뼈를 깎는 고통의 ‘와신상담’은 아니었던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151석의 과반의석을 가진 열린우리당이 각종 개혁입법안을 통과시키지 못했을 때도 그들은 당시 한나라당의 핑계를 댔다. 한나라당의 반발이 너무 거세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거대여당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말이다. 과반수 의석을 가졌을 때도 가지지 못했을때도 문제의 원인은 스스로가 아니라 남에게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부터의 잘못을 하나씩 고쳐나가지 않고 힘이 없다는 핑계를 댈 바에야 차라리 과반수가 안되면 정치를 하지 않겠습니다고 선언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혁신’은 가죽을 벗겨내야 하는 아픔이란 뜻이 있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낡은 것, 기본으로 이탈해서 쌓인 적폐, 이전투구의 권력싸움과 편가르기 등의 낡은 가죽을 벗겨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어려운 과정이고 필히 사람의 변화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평화롭다. 평화로운 반성에는 본질을 비껴간 성찰이 있고 스스로를 혁신의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자기 합리화가 도사리고 있다. 문제의 본질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니 두렵지 않고 스스로를 대상에서 제외시키니 아프지 않다. 두렵지도 아프지도 않고 그런데도 자신에게 주어진 기득권은 그대로인데 누군들 나서서 고치려 하겠는가? 이렇게 원인도 현상도 대책도 문건으로 오가고 한 두 번의 그럴 듯한 ‘쇼’에 언론들이 받아 써 주고 비상대책의 기간은 끝나버린다.

 평화로운 반성, 책상 앞의 혁신, 반복되는 비상대책, 되풀이되는 헛발질에 더 이상 마음을 줄 사람들이 없다. 양당의 양강구도가 언제까지나 영원할 것이라 누가 장담할 것인가?
 영화 ‘명량’을 빌어 말해보자. 새정치민주연합이 천행으로 불어닥칠 회오리를 바랄 심정이면 계속 해오던대로의 행태를 유지하면 될 것이다.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기도나 하시라. 그러나 백성이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배를 끌어줄 천행을 기다린다면 진심으로 두렵고 아파하며 분골쇄신의 모습으로 임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살고자 하는 자가 있다니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다. 우리는 살 수가 없다. 나는 바다에서 죽고자 이곳을 불태운다. 더 이상 살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새정치민주연합에 민심의 바다에서 죽기 위해 모든 적폐를 불사르고자 하는 용감한 이가 있는가?





[오택진 칼럼] 23
오택진 / <연구공간Q+> 대표.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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