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불법구금, 판사와 검사에게 알렸지만 묵살 당했다"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 입력 2016.01.27 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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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미문화원 폭파' 재심청구 / 신청인들 "잠 안재우고 밤새 구타·전기고문, 허위 자술 강요"


"내 팔뼈를 몇 시간 동안이나 뽑아놓고 이근안 본인은 자더라"

26일 오후 대구지방법원(제2형사단독 김태규 부장판사)에서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 재심청구 3차 심문기일이 열렸다. 이 사건 용의자로 지목돼 33년 전인 1984년 1월 19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박종덕(57)씨는, 당시 이 사건의 경찰 총괄지휘자였던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위가 대구지방경찰청 대공분실에서 진행된 조사 과정에서 자신에게 저지른 고문 사실을 증언했다.

(왼쪽부터)함종호, 손호만, 박종덕씨(2016.1.26.대구지법)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왼쪽부터)함종호, 손호만, 박종덕씨(2016.1.26.대구지법)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박씨는 1983년 9월 22일 대구시 중구 삼덕동 대구 미국문화원 폭파사건 발생 5~7일 후 대구남부경찰서에 자진출두했다. 경찰이 박씨를 용의자로 지목해 박씨 여자친구를 비롯한 지인들에 대한 조사를 벌였기 때문이다. 박씨는 이 때부터 검찰 기소 전인 10월 하순까지 "고문이 이어졌다"고 밝혔다.

재심청구 사건 담당 변호인 김진영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는 "당시 경찰 고문이나 가혹행위 내용을 기억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머뭇거리던 박씨는 33년전 고통스런 기억을 떠올렸다. "남부경찰서에서 5~7일간 한 숨도 잠을 안재웠다. 시경(대구지방경찰청) 대공분실로 옮긴 것까지 더하면 한 달간 잠을 못잤다. 졸면 따귀를 때리고 몽둥이로 밤새 구타했다" 박씨는 울음을 참다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특히 "시경으로 옮긴 뒤 3주간 1주일은 시경 최계장팀, 2주일은 이근안팀이 돌아가며 고문했다"며 "잠을 못 자게 하는 것도 힘들고 때리고 주리 트는 것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개인적으로 당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보지도 못한 선·후배들에 대해 허위 자술서를 쓰는게 가장 자괴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박종덕 등 5명에 대한 1984년 1월 19일 대구지법 판결문 / 자료.법무법인 덕수
박종덕 등 5명에 대한 1984년 1월 19일 대구지법 판결문 / 자료.법무법인 덕수

하지만 "이근안이 내가 허위로 자백한 내용으로 70여명의 조직도를 내 눈앞에 보이며 '조직사건으로 엮겠다'고 말하자 앞이 깜깜했다"면서 "나는 징역을 살아도 괜찮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엮는 것은 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근안 앞에 무릎 꿇고 빌었다. 그러자 이근안은 '재판에서 쓸데 없는 소리만 안하면 국보법으로 너만 넣겠다'고 했다. 알았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박씨는 경찰 수사 종료 후 검찰 송치 기간동안 대구화원교도소에 수감됐다. 이 기간 시국사건으로 기소된 옆방 재소자 이모씨의 일화도 떠올렸다. "그 사람이 검사한테, 경찰한테 고문받아 거짓 진술했다고 얘기하니 검사가 이근안한테 바로 데려갔다고 했다"며 "이근안한테 맞아 갈비뼈에 금이갔다며 나한테 경찰에 한 진술 그대로 하라고 조언했다. 때문에 재판에서 판사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이 사건 재심청구 당사자 5명 중 한 명인 함종호(59)씨의 고문 증언도 이날 법원에서 이어졌다. 함씨는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당시 유죄 선고를 받았다. "사건 발생 8일째 1983년 9월 30일 대구남부경찰서에 연행됐다. 맹목적 구타, 잠 못자게 하는 건 물론이고 전기충격봉으로 전기고문까지 했다"며 "아내에 대한 성적모독 발언도 했다. 고문 당한 사람 음성이 녹음된 것도 들려줬다. 벗어날 길이 없었다. '불어라'하는 말에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불었다. 죽고 싶었다"고 밝혔다.

1983년 9월 26일 연행 기록이 나와 있는 손호만의 당시 경찰 자술서 / 자료.법무법인 덕수
1983년 9월 26일 연행 기록이 나와 있는 손호만의 당시 경찰 자술서 / 자료.법무법인 덕수

대구지방경찰청 대공분실에서 보름간 가혹행위도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보름간 잠을 못자게 했다. 속눈썹이 천근같았다. 그 상황에서 이근안이 왔다. 조직사건으로 수사방향을 잡아 심문했다. '사회주의자냐', '시위를 예비음모했냐'고 물었다. 부인하거나 자술서가 마음에 안들면 고문이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벽에 세워 손바닥으로 가슴을 때리거나 몽둥이로 때렸다. 나중에는 같은 경북대학교 후배 손호만이 쓴 시위 예비음모 자술서를 그대로 베껴썼다. 거짓으로 쓴 것이었다"고 말했다.

경찰이 원하는대로 자술서를 쓴 뒤 1983년 10월 26일 대구지방법원은 박종덕씨와 함종호씨 등 5명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경찰에 구금돼 조사를 받은지 한달 만이었다. 함씨는 검찰 송치 후 불법구금과 고문 사실을 검사에게 알려 사건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다. 그러나 기대감은 무너졌다.

함씨는 "김모 검사에게 고문을 알렸지만 검사는 바로 슬리퍼를 던졌다. 복도에 나가니 호송해간 김계장이 다시 조사하겠다고 말했다"며 "그 때 이정도만 하자고 생각하고 다시 검사한테 갔다. 검사는 고문 사실을 수용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재판과정에서도 고문 사실은 인정받지 못했다. "최후진술에서 한 후배가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판사에게 알렸지만, 판사는 오히려 '학생이 공부도 않고 그런 말을 하고 다닌다'고 다그쳤다. 판사도 검사도 모두 고문과 불법구금을 묵살한 것"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1983년 9월 23일 <동아일보> 2면 정치에 나온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 기사
1983년 9월 23일 <동아일보> 2면 정치에 나온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 기사

손호만(58)씨도 이날 재심청구 신청인으로 참석했다. 손씨는 당시 '집시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고문의 기억은 그도 예외가 아니었다. "83년 9월 26일 친구 자취방에 가는데 경찰 3명이 팔을 꺽어 대구북부서 성산파출소로 연행했다"며 "파출소 옆 안전가옥에서 3~4주가량 조사받고 나서 대공분실로 옮겨졌다. 자술서 수 십여장을 쓰면서 마음에 안들면 고문이 이어졌다"고 밝혔다.

"내 행적을 쓰게 하고 누구를 아느냐고 묻는 것이 자술서 주요 내용이었다. 졸거나 사실대로 적으면 두드려 맞았다. 엎뜨려 뻗쳐 맞다가 수위가 올라가면 옷을 다 벗겨 구석에 물구나무 서게 하고 몽둥이로 국부를 찌르며 수치심을 줬다. 대공분실 반지하 독방에서는 이틀 가량 잠을 안재웠다. 무릎을 꿇게 하고 무릎 뒤에 각목을 밀어 넣어 밟았다. 사정없이 차고 뺨을 때렸다. 계속 반복됐다"

긴 한숨을 내쉰 손씨는 당시 기억에 고통스러워했다. "고문 뒤 자술서를 쓰게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자술서와 안맞다고 했다. 결국 함종호 선배가 쓴 자술서를 보라고 했다. 그걸 베꼈다. 이후 검사에게 가 고문 사실을 알렸지만 '왜 너만 이러냐. 다시 대공분실 갈래'라고 물었다. 법정에서 뒤집자는 막연한 기대를 했다. 하지만 법원도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씁쓸해 했다.

반면 검사측은 "연행 과정에서 포승, 수갑 등 강압이 없었고, 이미 재판에서 고문 사실 등을 알렸으며, 재심청구 신청인 전원이 1심 선고 후 항소심을 포기했다"며 "재심 사유로 부족하다"고 반박했다.

한편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 재심청구 여부는 오는 3월 초 마지막 심문기일에서 결정된다.

▲변호인이 2차 심리 당시 가져 온 '진실화해위' 결정문(2015.12.17)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변호인이 2차 심리 당시 가져 온 '진실화해위' 결정문(2015.12.17)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대구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지난 1983년 9월 22일 저녁 9시 30쯤 대구시 중구 삼덕동 대구 미국문화원 정문 앞에 높인 정체불명의 가방에서, 제작회사명이 적히지 않은 TNT, 부비트랩, 전기뇌관 등 폭발물이 터져 1명이 숨지고, 4명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국가안전기획부, 대구지방경찰청, 국군, 육군 등은 합신조(합동신문조)를 조직해 수사를 벌였다. 합신조는 1년 2개월간 용의자 749,777명을 선정해 수사를 했다. 하지만 폭파사건 범인을 검거하지 못하고 1984년 11월 수사를 종결했다.

이 과정에서 합신조는 용의자를 '남파간첩', '국내 좌경 불순분자'로 추정해 장기수사를 벌였다. '학생운동권'이 용의선상에 오른 이유다. 수사본부는 경북대 '학생운동권'이던 박종덕, 함종호 등 7명을 금지도서를 보유했다는 등의 이유로 국보법, 반공법, 집시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그러나 경찰이 이들에 대한 구속영장을 발부 받은 시점은 1983년 10월 26일로 기재된 반면, 진술조서 일자는 이보다 앞선 9월 30일까지 거슬러간다. 때문에 박종덕씨 등은 "영장 없이 구금해 고문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박종덕씨 등 5명은 진실화해위의 2010년 6월 결정문을 인용해 이 사건에 대한 재심청구를 지난해 법원에 냈다. 진실화해위는 결정문에서 "박종덕 등은 대구 미문화원 폭파 사건과 관계없이 반국가단체 고무·찬양·동조죄 등으로 구속돼 유죄 판결을 받았다"며 "조사 결과, 경찰이 약 30일간 불법구금한 상태에서 가혹행위를 가하고 자백을 강요하는 등 인권을 침해하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처벌받도록 한 반인권적 사건임이 밝혀져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형사소송법(제420·422조)은 '원판결의 증언·증거물이 허위나 위조인 것이 증명될 경우 유죄 판결을 받은 자의 이익을 위하여 재심을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때문에 박종덕씨 등 5명은 당시 사건이 "불법구금과 고문 등 허위로 자백을 강요받은 조작된 사건"이라며 재심을 청구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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