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의 또 다른 고문 피해자가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 받았다.
전두환 정권 당시 이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 누명을 쓴 9명 전원 41년 만에 누명을 벗게 됐다.
대구지법 제3형사단독 박태안 부장판사는 23일, 지난 1983년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에 연루돼 '국보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유죄를 선고 받은 신창일(64)씨 재심사건 선고 공판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불법구금으로 인하여 당시 경찰과 검찰의 진술조서의 증거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며 "공소사실을 인정할만한 신빙성이 없으므로 당시 증거를 모두 배제하고,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결했다.
1983년 대구 미문화원에서 의문의 폭파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당시 23살 경북대학교 학생 신창일씨를 용의자로 지목해 구금했다. 수사 과정에서 폭파사건 연루 증거는 나오지 않자, 경찰은 신씨가 학습모임에서 정부를 비판한 것을 이유로 들어 '국보법 위반' 혐의로 송치했다. 검찰은 신씨를 기소해 재판에 넘겼고, 대구지법은 신씨에 대해 국보법 위반 혐의를 인정해 징역 1년 6월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수십년이 지나 신씨는 진실·화해위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진실화해위)에 "고문에 위한 인권침해 사건"이라며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진실화해위는 조사 끝에 지난해 신씨에 대한 경찰의 영장 없는 불법구금과 구타, 고문 등을 인정하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실화해위는 "국가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불법적 수사와 중대한 인권침해로 국가는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재심 등을 통해 화해를 이뤄야 한다"고 권고했다.
지난해 신씨는 재심을 신청했다. 같은 해 12월 재심 개시 결정이 났다. 올해 1월부터 재심 재판이 열려 모두 6차례 증거조사와 증인심문이 진행됐다. 지난 9월 11일 마지막 공판에서 검찰은 '무죄'를 구형했다. 신씨까지 무죄를 선고 받으므로써 이 사건으로 재심을 청구한 피해자 9명 전원 무죄를 선고 받았다.
41년 만에 무죄를 선고 받자 신창일씨는 눈물을 참지 못했다. 신씨는 "23살 청년이 겪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의 트라우마는 깊고 넓었다"며 "저를 끝으로 1983년의 억울한 기록을 바로잡아 다행"이라고 말했다. 또 "1983년 대구 미문화원 폭파사건 관련하여 재심을 신청한 9명 중 오늘 제가 무죄를 선고 받아 마무리됐다"며 "헌법과 법률에 감사하며, 사법부와 진실화해위에 존경을 표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묵묵히 인내해준 가족들과 3년 전 과거사위원회 실무를 도와준 이, 저에게 많은 응원과 용기를 준 동기들과 후배들, 선배님들에게도 이 기쁨을 나눈다"면서 "불편한 몸에도 서울과 대구를 왕복하며 변론을 책임진 동기 이명춘 변호사에게도 고마움을 표하고,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보도해준 <평화뉴스>에도 감사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역사 앞에 겸손하게 현재 나의 위치를 잊지 않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했다.
1983년 대구 중구 삼덕동 미국문화원 앞 가방에서 TNT 폭탄이 터져 1명이 숨지고 4명이 다쳤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합동신문조(합신조)를 꾸려 1년 넘게 수 만명을 불러들이는 강압 수사를 벌였다. 언론은 연일 '간첩 소행'이라는 보도를 내보냈다.
이 과정에서 대학생 신분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던 신씨 등 당시 경북대 학생 7명과 시민 2명 등 9명은 불시에 경찰에 끌려가 한 달 넘게 불법구금을 당했다. 특히 '고문 기술자' 이근안씨 등에게 모진 가혹행위를 당해 자백을 강요 받았다. 이들은 각각 국보법, 반공법 위반 혐의로 유죄를 선고 받고 억울한 감옥살이를 했다. 피해자 8명은 앞서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선고 받았다. 폭파사건 진범은 검거 못하고 종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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