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탄핵 국면, 다시 '삼성'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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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렬 칼럼] "삼성 기득권 세력과 부패동맹, '국익'의 이름으로 숱한 비국민을 만들지 말라"


현재까지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가장 실망스럽고 충격적인 기억은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영장이 기각되어 그가 미소를 띠며 유유히 구치소를 빠져나오는 장면이었다. 대통령과 삼성의 뇌물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예리하게 벼려지던 특별 검사의 검이 삼성이라는 강고한 방패를 만나던 순간이었다. 이어 나오는 소식을 따라가 보면 모든 것의 정점에 삼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한겨레> 2017년 1월 20일자 1면
<한겨레> 2017년 1월 20일자 1면

휘날려야 할 태극기를 휘두르며 얼굴에 새겨진 굴곡진 인생의 의미와 나라의 상징을 한꺼번에 더럽히는 늙은 군상들의 모습 이면에 삼성의 돈이 등장하고 있고, 최순실 이권 사업으로 통했던 국가의 해외원조사업에도 삼성 인사가 개입되어 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상황이 이런데도 다른 모든 연루자들과는 달리 삼성의 최고 책임자 이재용 부회장에게 사법부가 아직까지 법적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 대통령 탄핵 국면의 올바른 해결 여부는 결국 삼성과 재벌들에게 우리 사회가 어떻게 책임을 묻고 지금까지와는 어떻게 다른 세계를 만들어내는가에 달려 있다.

내부자의 기록

작금의 사태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지금, 지난 2007년 가을 정의구현사제단의 보호 아래 삼성이 뇌물 등의 방법을 통해 검찰, 사법부, 언론, 심지어는 청와대까지 회유와 포섭의 대상으로 삼았던 사실을 양심 고백한 김용철 변호사의 고백록 <삼성을 생각한다>를 떠올린다. 김용철의 고백록은 한국을 지배해온 명실상부한 왕실의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으며 그 바깥 세계를 그들은 어떻게 인식했는가에 대한 내부자의 기록이었다. 일차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최종적인 탄핵이 중요하고, 정권교체 이후가 마찬가지로 중요한 이 시점에 <삼성을 생각한다>를 다시 읽는 것은 노무현의 실패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정치적 이유가 있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 정치적 이유가 단순히 어떤 정치공학적 이유인 것만 아니라 현 한국 사회의 기본 모순을 파악하는 데에 단초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 따르면, 애초 ‘참여정부’라는 노무현 정권의 명패마저 삼성의 수뇌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고 할 정도로 노무현 정권은 처음부터 삼성의 경제적 힘에 의존해서 출발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며 삼성을 비롯한 재벌들의 경제력에 의탁해 정권을 운영했던  노무현 정권의 행태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것이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점이다. 5천만이 모여사는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이익은 삼성이라는 거대기업의 이익과 동일시되었다.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사회평론. 2007)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사회평론. 2007)
<삼성을 생각한다>는 국가와 기업의 이익동맹 체제가 사실은 그저 기득권 동맹체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김용철 변호사는 국가의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자긍심으로 검사의 역할을 수행한 이력을 지녔으면서도 삼성의 소유주 일가와 그 측근 부역자들의 이익을 위해 부패의 늪에 몸을 담근 불운의 법조인으로서 무소불위의 삼성 지배자들의 힘과 부패상을 현장에서 증언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인물인 만큼 그의 고발은 리얼할 수밖에 없었다.

김용철 변호사의 증언의 핵심은 일개 기업에 지나지 않는 삼성 구조조정본부(구조본) 핵심팀장들은 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는 거짓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의 믿음은 왜 거짓인가?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은 삼성을 지배하는 소유주 일가의 사적 이익과 안전일 뿐이기 때문이다. 삼성 오우너의 마름들이 국가의 공적인 업무를 맡은 자들을 뇌물로 매수함으로써 실제로 벌어진 일은 공동체로서의 국가의 역할을 마비시키는 것이다.

국가라는 조직을 무력하게 만드는 위력을 보여준 삼성의 경제력이라는, 국가=삼성의 2007년 당시 구도에 최순실이라는 사인(私人)만 끼워 넣으면 2016년 11월 시민항쟁을 불러온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사건 구조와 완전히 판박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이른바 ‘민주’ 정권 10년의 마지막 해였던 2007년의 대한민국의 풍경과 이른바 ‘보수’ 정권 10년의 마지막 해인 2017년의 탄핵 정국의 모습은 상대적 권위주의의 정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구조적 상동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삼성 기득권 세력과 '부패 동맹'

현 탄핵 정국을 예측한 듯 현실성이 두드러진다 하여 화제가 되고 있는 영화 <더 킹>은  권력의 대세를 읽고 그 흐름에 순응하여 궁극적으로 왕이 되고자 하는 정치 검찰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정작 영화는 그 권력의 실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삼성을 비롯한 재벌들이야말로 권력의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 실체적 존재다. 검찰도 대통령도 2007년과 2017년 우리시대의 왕이 아니다. 공식, 비공식적으로 절대적인 경제력을 휘둘러 모든 국가 기관을 자신들의 사적인 이익 충족을 위해 복속시킬 수 있는 삼성 재벌이 왕의 권능을 휘두르고 있다. 정치사상가 더글러스 러미스가 지적하고 있듯, 부자를 뜻하는 영어 어휘 rich의 어원이 왕을 의미하는 라틴어 rex라는 사실만 보더라도 인간의 공동체는 돈의 힘에 이렇듯 언제나 취약해질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는 것이다.

11월 시민항쟁이 시작된 이래 광장의 촛불 민심을 요약해보자면, 뇌물과 같은 부패로부터 자유로운 정권으로의 교체 정도일 것이라는 점은 여러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되는 바이다. 선거 구호로 ‘정권교체’라는 깃발을 올린 유력 대선후보도 있지만, 유권자들이 열망하는 정권 교체는 단순한 선거구호,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이다. 삼성과 같이 강력한 물적 토대를 지닌 권력 주체가 국가의 공적 기구를 무력화시킬 때,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어떤 피해를 보며 무엇을 경계해야 하는가?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으며 두 가지를 생각해봤다.

삼성에서의 직장 생활을 통해 김용철 변호사가 느꼈던 환멸감이 이 책이 쓰이게 된 동기 중 하나였다. 그를 그토록 깊게 절망시킨 것들은 죄책감과도 연관을 지니고 있다. 삼성-검찰 사이에서 부패의 고리 역할을 했던 자신에 대한 삼성 측 대우와 정작 삼성에 돈을 벌어다 주는 생산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 여건 사이의 괴리가 의미하는 바를 김용철은 예민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부패로 인해 생기는 이득은 조직의 기득권을 강화할 뿐, 그 과실이 정직하게 일하는 노동자들의 몫으로 돌아가는 법은 없다. 부패와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시에 부패 기득권 세력은 일하는 사람들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는 주목한다. 삼성에서의 노조활동이 금지된 상황은 물론 조직에 대한 어떤 의문 제기도 허용되지 않으며 이를 위반할 때 징계와 해고 등의 일방적인 위력이 행사된다는 점에서 기층 노동자의 주체성과 목소리는 일방적으로 억압되어 있는 실정이다.

12차 대구시국대회(2017.1.21.대구 중앙로)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12차 대구시국대회(2017.1.21.대구 중앙로) / 사진. 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이러한 삼성의 기득권 세력과 부패 동맹을 맺고 있는 검찰 같은 사법기관 쪽의 정서 역시 이 책에서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일하는 자의 자긍심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 “우리는 개다. 물라면 물고 놓으라면 놓는다.” 김용철 변호사는 영화 <더 킹> 속에 등장하는 정치 검찰의 병적인 자부심보다는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하는 검찰의 자괴감에 더 초점을 맞춰 기술하고 있다. 검찰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한때 자긍심 넘치는 검찰의 일원이었지만 삼성의 부패 고리 역할을 수행했던 자신에 대한 자괴감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다시 태어나고 싶었다,” “본래의 내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김용철이 삼성 변호사 역할을 하면서 느꼈던 소회다. 군사독재 시절에 있었던 고문과 같은 신체형벌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부패는 주체성 상실을 가져온다. 본래의 자신을 되찾고 싶다는 김용철의 소망은 위력적인 부패 세력 앞에서의 무력감으로부터 회복하고 싶은 헛된 희망이다.

주권자 시민의 명령

그래서 “재벌도 공범이다,” “재벌을 해체하라”며 광장에서 표출되는 촛불 민심은 우리에게 더욱 소중하다. 왜냐하면 2007년의 김용철의 형편과는 달리 공적인 존재로서, 주권자로서 개별 시민들이 주체성을 되찾아 자본과 결탁한 모든 세력으로부터 권력을 되찾아 올 수 있는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은 기회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김상준 교수의 말대로, 지금은 한국 사회의 실재가 광장에 모인 촛불 시민인 역사적으로 매우 드문 국면이다. 대통령 탄핵이 촛불시민의 명령이듯, 정권교체라는 말이 함축하고 있는 바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라는 것이 광장의 명령이다. 보수 정권 10년은 물론이고 노무현 정권의 실패가 재벌에 의해 주도되는 경제성장에 기반해서 국익 우선주의를 추구했던 데에서 비롯되었던 만큼, 과거의 그러한 오류를 반복하지 말라는 것, 국익의 이름으로 숱한 비국민을 만들지 말라는 것,--그것이 주권자 시민의 요구이자 명령이다.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촛불 집회가 변질되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촛불 집회의 의미를 정치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은 대권의 야욕에 불타오르는 정치인 자신들이다. 가령, 친노 정치세력의 적통을 이어받은 것을 자부하는 안희정 충남지사는 안정적인 중도 확장성을 과시하기 위한 정략의 일환으로 최근 한 인터뷰에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싸움을 낡은 정치로 규정하고 오로지 국익 신장이라는 지상 목표를 향한 국민대통합의 길에 나서겠다고 선언하였다.  적어도 정치적으로 옳고 그름의 시비를 도외시 한 채 국가적 이로움을 추구하면 부득이 그 국익은 어떤 국익이며 누구의 이익을 의미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공동체로서의 국가 전체의 이익은 실현불가능한 문제가 된다. 노무현 정권 당시 추진되었던 새만금 간척 사업, 평택 대추리의 미군기지화, 이라크 침략 전쟁 파병, 황우석 줄기 세포 사기극, 한미 에프티에이 체결—이 모든 국가적 가면극들이 당시 한 치의 틀림도 없이 국익의 이름으로 연출되고 수행되었지만 막대한 시민적, 생태적 희생을 치루고 얻은 ‘국익’은 과연 ‘우리’의 이익이었는지, 여전히 의문이 아닐 수 없으며 이 중에는 명백히 국가적 사기극으로 판명된 사건들도 적지 않다. 이 모든 것이 국가적 이로움을 앞세워 옳고 그름의 시비를 따지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들이다. 정치적인 옳고 그름은 결국 시민들이 권력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국익의 이름으로 사드를 배치하고 카길을 유치하며 시대적 요청인 기본소득을 공짜밥으로 치부해버리겠다는 정치인은 삼성으로부터 15억의 부정한 돈을 받은 혐의로 영어의 몸이 되었던 당시의 치욕스런 순간을 되새겨봐야 할 것이다.

세 달 이상 추운 겨울밤 천만이 넘는 시민이 광장으로 나와 민주주의를 외친 결과 다른 세계를 꿈꿀 수 있는 상황을 맞이한 정치인이라면, 맹자를 따라 이로움이 아니라 인과 의에 기초한 왕도 정치를 말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옳고 그름을 가리는 싸움과 국익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한 기술과 지혜를 모아 유권자들에게 표를 달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승렬 칼럼 1]
이승렬 /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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