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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폐 청산과 토지 소유 방식
[이승렬 칼럼] 토지배당, 국토보유세를 걷어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면
2017년 03월 29일 (수) 10:22:00 평화뉴스 pnnews@pn.or.kr

오늘 아침 전해진 소식이다. 이순자가 회고록을 냈다고 한다. 광주항쟁은 무장소요사태고 전두환은 5.18의 희생자라고 했다고 한다. 적반하장은 이럴 데 쓰는 말일 것이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의 침전물이 혼탁한 물살을 타고 강 표면으로 올라와 악취를 풍긴다.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 자 <한겨레> 신문의 '정치 막전막후'(전문 보기)라는 코너에 장문의 문재인 분석 기사가 실려 있다. 기사의 핵심인즉, 문재인이 주장하는 적폐청산이라는 구호가 정적에 대한 싹쓸이 제거여서는 안되고 대화와 타협이어야 하며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대화와 타협이 민주주의 정신이라는 것은 너무 당연한 말이어서 그 자체로는 하나마나한 일반 명제가 되기 십상이다. 정치인에게 조언하려면 정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외세의존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세력들에 의해 끊임없이 헌정질서가 왜곡되고 훼손되어온 대한민국 현대사를 돌아볼 때, 다극화된 사회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해 주권자들의 목소리를 모아 청산 대상을 분명히 하고 효율적으로 그들을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는 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민주주의다. 이런 시대적 요청이 만족되지 않으면, 역사의 시계바늘을 되돌리려는 자들의 준동은 반복될 것이며 그때마다 우리의 삶은 농단될 것이고 모멸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대중의 전두환/노태우 사면과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


위의 기사는 흥미로운 역사적 사례와 우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말미를 맺고 있다. 청교도혁명 때 찰스 1세 처형이 크롬웰이라는 더 큰 악을 불러왔다는 것. 그 역사적 사례를 통해, 기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전두환과 노태우 사면이 국가의 안정적인 운영을 위해서 잘된 일임을 이해시키려 한다. 아울러, 천사와 악마의 싸움에서 악마의 무기인 증오를 통해서 천사가 승리하였지만 천사는 증오하는 마음으로 인해 이미 악마로 변해버렸다는 우화를 소개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전두환/노태우에 대한 김대중의 사면은 분명히 정치적이다. 이른바 민주개혁 진영의 정치적 힘은 수구보수 세력에 비해 비교적 최근까지도 완연한 열세였지 않은가? ‘보수로의 기울어진 운동장론’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정치지형을 설명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가설이었다. 김대중이 자신을 핍박한 자들에 대해 화해와 용서를 내세우며 자신의 정치 행위를 종교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킨 데에는 결국 당시 역사적 국면에서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작용한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의 정치적 지혜 또는 현명함과는 별도로, 그의 “용서와 화해”가 산업화 ‘업적’을 구실로 친일/군부쿠데타/경제독점 세력이 정치적 위세를 그대로 이어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것 또한 사실이다. 이들 세력의 유지 또는 계속된 확장은 그 이면에서 농촌의 붕괴, 소농의 해체, 비정규직 노동자 탄압, 노동조건의 악화, 청년 실업자의 양산 등 오늘날 우리가 헬조선이라 일컫는 모든 사회현상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청산되지 못하고 남아서 오히려 위세를 떨치는 세력들은 우리 사회를 빠른 속도로 경직시켜 대폭발의 위험을 잉태시키고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이런 위기는 우리만의 역사적 특수성을 반영하는 면도 있지만 동시에 부르조아 계급이 주도하는 서구 시민사회의 형성 양상과도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그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이고도 전형적인 사건이 다름 아닌 크롬웰의 청교도혁명이다.

위의 ‘정치 막전막후’ 기사에서 소개한 찰스 1세의 처형 사건이 청교도 혁명의 역사적 혼란을 낳았다는 시각은 사실은 왕당파와 의회세력 사이의 힘의 균형을 이루는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고 보는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을 잡은 크롬웰은 청교도 혁명 과정에서 의회파를 지지했던 수평파 혁명군의 요구를 철저하게 짓밟음으로써 청교도 혁명 과실을 의회 귀족들만의 전리품으로 만들어버렸다. 수평파들의 요구는 이런 것이었다. 엔클로저 운동으로 인한 토지집중의 완화(토지 재분배), 소작농들의 차지기간의 보증 등과 같이 무너져버린 당시 농민들의 삶의 토대를 복원시키자는 것이었다. 청교도혁명의 전조였던 1628년의 권리청원에는 재산권 보호와 인신의 자유와 같은 서구근대 민주주의 체제의 기초를 이루는 조항이 담겨 있지만, 정작 권리대장전에서 보장하던 민중들의 자유로운 토지 사용권은 삭제되었다. 말하자면, 공유토지를 사용할 수 있었던 공동 주체인 풀뿌리 민중의 생존 근거로서 역할을 해오던 ‘공유하기(commoning) 전통’은 권리청원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땅과 민중 사이의 연결줄을 끊어버린 권리청원의 정치적 의미는 그것이 민중의 생존을 배제한 가운데 의회와 왕당파만의 타협과 대화의 결과물이라는 점이다. 크롬웰은 토지의 사유화에 따른 경제 집중을 완화시키려는 청교도 혁명의 혁명정신을 저버린 인물이다. 결국 크롬웰은 왕을 처단했기 때문에 역사적 혼란의 아이콘이 된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일반 평민(커머너)들의 목소리를 배제한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의 표상이다.

<벌레 이야기>와 <밀양>

김대중의 전두환/노태우 사면은 적폐척결 대상인 권위주의 세력과의 대화와 타협을 의미한다. 위에서 말했듯, 그 역사적 결과는 헬조선의 창출이다. 촛불혁명의 결과로서 탄생하게 될 민주정부가 김대중 식의 대화와 타협으로부터 얻어야 될 역사적 교훈은 이제 없다. 세월호의 비극과 넉달 간의 촛불혁명이 만들어낸 역사적 국면이 그때와는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섣부르게 시도되는 정치적 용서와 화해는 용서와 화해의 숭고한 정신을 남용하여 우리 사회의 구조적 폐악과 모순을 감추게 될 가능성을 낳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폐악과 모순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여기에 책임져야 할 세력으로 하여금 책임지게 하는 사회적 정의가 실현되었을 때, 그때야 비로소 우리는 용서와 화해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임 이전에 사랑과 증오를 운위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적 책임 이행 이후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도모할 기회를 주권자들에게서 빼앗는 일이다. 이렇게 되는 상황을 작가 이청준은 <벌레 이야기>라는 우화에서 그리고 있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는 가해자가 충분히 책임지는 정신과 행동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시도되는 화해 종용은 필연적으로 피해자들을 진정한 의미의 용서와 화해의 주체가 되지 못하게 함으로써 벌레 같은 존재로 만든다는 점이다. 우화의 역사성은 읽는 이들이 처한 역사적 상황과 맥락에 맞춰 그 우화를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화의 보편성은 그 우화가 만나는 역사적 구체성에 의해 생성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천사와 악마의 우화 읽기가 역사적 맥락을 배제한 채 무균 처리된 실험실에서 이루어지 듯하면 안되는 이유다.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생생하고 구체적인 시대상황 속에 배치하여 재구성한 작품이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이다. <밀양>은 김대중, 노무현을 거쳐 이명박 정권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가 진보와 보수를 두루 관통하는 동안 소비주의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철저하고 집요하게 한국 사회의 공동체성을 파괴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야의 주요 정파들 사이의, 중산층과 자본가 상류계층 사이의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한국 사회는 앞으로 ‘진전’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령, 여러 주요 경제 강대국들과의 자유무역협정을 연이어 체결하며 다른 한편으로 부족하나마 기초생활수급자들에 대한 복지 확충을 이뤄가고 있는 체제의 현황은 계급적 착취와 지배에 대한 용서와 화해가 이뤄지고 있다는 증좌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삼성과 노무현 좌파 정권의 유착 역시 국정을 이끌기 위한 놀라운 대화와 타협의 산물이다. 영화 <밀양>에서 그려지는 바, 교회를 매개로 한 가해자의 용서와 피해자의 화해는 이 모든 것에 대한--그리고 이 모든 것의 허구성에 대한—우화적 알레고리다.

   
▲ 영화 <밀양>

영화 <밀양> 속 밀양은 주인공 신애에게 어떤 장소인가? 우리가 발붙이고 일상을 살아야 하는 장소는 마땅히 사랑하는 사람과 친구 가족들과의 기억과 흔적을 소중하게 여기며 이웃들과 우의와 환대를 나눌 수 있는, 그런 터전이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바람 피다 교통사고로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을 신애가 무슨 이유 때문에 삶의 장소로 삼으려 하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영화 속 밀양은 애초부터 신애가 무엇인가 허위적인 어떤 몸짓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그런 문제적인 장소라는 점이다. 실제로 그녀가 찾은 지방 소도시 밀양은 사랑하는 이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는 장소가 아니라 이미 소비주의 이데올로기에 침윤되어 모든 것이 메트로폴리스 서울의 시뮬라크르로 변한, 그런 공간이었다. 신애가 생계를 이어가고 아이를 키워야 하는 밀양의 현실 상황 자체에 신애의 비극이 잉태되어 있다는 사실은 영화의 중요 메시지를 구성한다. 소비주의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 영화 속 밀양의 사물과 인간관계는 모두 소비가능한 상품으로 존재한다. 신애의 비극은 바로 그 점에서부터 출발한다. 신애는 밀양이라는 낯선 장소에서 아이와 자신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서 부동산 투자자의 행세를 하고 그것이 아이의 유괴살해로 이어진다. 상품으로서의 땅의 소유 가능성이 신애를 파멸과 광기로 몰아가지만 영화는 마지막 순간, 속물이지만 순박함이 남아있는 남자 친구의 돌봄 아래 양지바른 한 뙈기의 땅이 신애에게 구원이 될 수 있음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물질적 번영과 사회적 위신을 약속하는 탐욕의 대상으로서의 땅과 사랑하는 이와 우정을 나누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땅—토지를 바라보는 이 두 가지 관점의 차이가 이른바 좌파 신자유주의 노선을 걸었던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내부에서 체험하고 돌아온 이창동 감독의 근대문명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다.

국토보유세와 기본소득

그것이 자본주의 체제든, 신자유주의 체제든, 이른바 서구식 대의제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여 국가권력과 경제권력이 서로 유착해온 역사가 서구 근대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정경유착의 근원적 뿌리는 일찍이 맑스가 원시적 축적이라고 부른 바 있는 토지 수탈이다. 서구 민주주의의 관습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권리청원에서 농민과 사회적 약자들의 토지사용권이 지워지고 크롬웰이 수평파 농민들을 진압하는 그 순간부터 근대의 실패는 예약되어 있었다. 브렉시트와 유럽 극우파의 부상, 미국 트럼프의 등장 등은 서구 근대가 한계상황까지 와 있음을 보여주는 증후들이다. 영국 좌파의 원로격인 페리 앤더슨은 최신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서 이러한 우파 진영의 부상에 맞서 좌파는 래디컬해지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없음을 강조했다. 영어에서 래디컬이라는 말은, 그 어원이 시사하듯, 문제의 근원을 뿌리까지 찾아들어가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런 태도는 ‘오래된 미래’를 여는 길이기도 하다. 인구와 사회 경제 규모가 비대해진 지금에 와서 권리청원과 크롬웰 이전의 토지공유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토지의 사적 보유에 대한 조세를 통해 사회 취약 계층에게 배당금의 형태로 되돌려 줌으로써 토지공유 시대의 사회적 평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여긴 이는 바로 미국 독립 혁명 사상가 토머스 페인이다. 그로부터 수십 년 후 정치경제학자 헨리 조지는 경제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사회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근원적인 방식으로서 토지공개념(지공주의)를 제시하여 지대를 토지소유자의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고전경제학의 기본 공리를 깨뜨린다.

길을 잃으면 오던 길을 되돌아봐야 새로운 길이 열리는 법이다. 박정희 이래 한국인들이 환호하던 경제성장의 길이 막히고 마침내 그 딸이 탄핵되어 권좌에서 몰려난 지금, 마침 적폐를 청산하고 새로운 길을 여는 방식으로 국토보유세를 걷어 전국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대통령 후보가 등장하였다. 이재명, 그의 당선 가능성과는 별도로 이제 우리 사회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숨돌릴 틈 없이 앞으로만 달리던 것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보며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자는 목소리가 정치권에서까지 나오게 된 것은 일말의 희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렬 칼럼 3]
이승렬 /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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