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력 정치인의 “선의” 발언은 20세기와 21세기 지성사 언급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정치와 정치인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새삼 묻게 만들었다. “선의” 발언이 사실은 반어법이었다는 해명은 수사학적 분석에서부터 그 발언이 있기까지의 맥락에 대한 분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평에 의해 대체로 그 타당성을 잃어버렸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므로 선의 발언을 내놓은 그 정치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여기서 다시 재론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로 보인다. 대통령 뇌물 공여의 주요 수단이 되었던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이 선의에 의한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든 것이 문제였을 뿐이라는 그의 사과는 사실상 사과가 아니었던 것만큼은 분명해보이기 때문이다.
대통합과 통섭
문제의 발언이 있던 다음날 한 티비 뉴스 인터뷰에서 선의 발언은 다시 대통합의 정신이야말로 한 세기를 가르는 시대정신이라는 거대담론으로까지 비약된다. 20세기의 정신이 의심, 분석, 해부라면 21세기 정신은 통섭이라는 것이다. 정치의 영역에서 말을 하는 목적은 그 말의 실제적 효과로써 일정한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려는 것이다. 정치적 언어가 이렇게 추상성이 강할 경우, 말하는 이의 의도를 가리는 나쁜 결과를 낳을 뿐이다. 그러나 여기서 통섭이 새로운 시대의 정신이라고 말한 이가 무엇 때문에 그런 발언을 했는가의 의도를 추정해보는 것이 어렵지는 않다. 선의 발언의 효과가 자신이 바라는 방향으로 발휘되지 않고 커다란 정치적 논란을 일으키자, 정치적 적대 세력들 간의 대통합이 정당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결코 급 낮은 정치공학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높은 차원의 철학적 배경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리라.
그러나 여기서 간과된 것은 “높은 차원”의 지성적 담론 역시 급 낮은 정치공학을 치장해줄만큼 고상하지만은 않다는 점이다. 학문 영역 간, 특히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이 운위되지만, 통섭이라는 지성계의 유행 담론은 실제에 있어서는 분과학문 간 융합 시스템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지 오래다. 대학 교육의 편제와 연구지원 체계를 지배하는 융합 담론은 결국 인문학을 문화 컨텐츠라고 부르는 산업적 재료로 변질시켰다. 좀더 쉬운 말로 바꿔 말하면, 인문학이 자본주의 시장에서 황금알을 낳는 돈벌이 수단 이상도 이하도 아닌 상태로 존재하도록 만드는 게 융합이고 통섭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융합은 테크놀로지에 의해 주도되는 산업 체제 속에 인간이 무력감 속에서 무저항적으로 편입되게 만드는 권력 체계와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체제와 담론 속에서 인문학과 지성이 발휘해야 할 의심과 분석, 비판과 성찰의 특성은 제거된다. 20세기는 ‘의심과 분석’, 21세기는 ‘통섭’으로 나누는 도식이 맞다고 하기도 어렵지만, 그런 시대적 추이는 당위적으로 따라야 할 진리라기보다는 테크놀로지와 시장이 결합하고 그 결합체를 국가권력이 정치적으로 뒷받침해줌으로써 발생하는 반지성적 흐름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한 ‘분석’(박경미, 2006)에 따르면, 통섭 담론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진화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론은 표면적으로는 단순히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대통합을 지향하고 있지만, 한걸음 더 들어가보면 유전생물학의 연구 성과에서 파생되어 나온 과학주의 이데올로기로 철학과 종교사상을 비롯한 인문학 전반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이념적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분석과 비평이 보여주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높은 차원’의 과학철학의 영역에서든 ‘낮은 차원’의 정치공학의 영역에서든 정치적 힘의 역학관계가 언제나 인간의 언어와 담론체계의 타당성을 살펴보는 데에 중요한 판단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21세기 지성사를 내세운다고 해서 선의에 입각한 정치적 대통합 주장이 무조건적인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이제 분명해졌다. 사실을 말하자면, 20세기든 21세기든, 근대국민국가 체제가 확립된 이후 정치적 선의는 성립불가능한 개념이 되었다. 왜냐하면 막스 베버의 말대로 국가는 폭력/강권력의 독점을 합법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조직이며 국가적 폭력/강권력이야말로 국가라는 존재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운영을 책임지려는 정치인과 정당의 언어는 제 아무리 선의를 앞세워도 그것이 최종 단계에서 폭력/강권적 집행으로 표현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그런 만큼 선의와 폭력은 결코 양립될 수 없다. 단지, 정치적 의도에 따라 행사된 국가적 폭력 행위를 수행한 자는 그에 대한 응분의 법적, 정치적 책임을 감당하면 되는 일이다. (막스 베버는 이러한 정치적 책임을 책임윤리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협치와 책임윤리
선의론에 입각한 대연정의 변호 과정에서 나온 또 하나의 자기 변론이 협치론이었다. 공동정부와 같은 강한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적대세력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대화를 통해서 상대의 동의를 구해가는 민주적 국정 운영을 해가겠다는 것이다. 적대적 성향의 정치 세력과도 기꺼이 대화를 해서 협력을 구하겠다는 것이야 원론적으로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것은 그 자체로 하나마나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작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근대국민국가체제와 민주주의가 양립하기 위해서는 협치가 단순히 정치적 지배 세력 간의 타협과 조정만을 의미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협치, 즉 거버넌스는 시민들의 동의에 기초한 통치를 의미한다는 것이 고전적인 의미에서 정치학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국가 간 합의와 협정은 무조건적으로 존중되어야 하는가? 국가를 대표한다는 지배자들이 시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생략한 채 맺어놓은 합의와 협정은 결국 국가라는 폭력 기구의 관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과두세력 간의 이익 동맹 협정에 지나지 않는다. 록히드 마틴이라는 군수업체의 이익을 뒷받침하고 있는 한미 군부 사이의 사드 한반도 배치 협정은 시민들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이루어졌다. 그러다보니 수 대에 걸쳐 농사를 짓고 생계를 이어오던 성주 소성리 땅의 사람들은 삶의 터전과 역사와 문화를 송두리째 잃게 될 위험 앞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여름이 가고 또 가을이 가고 다시 한 겨울을 다 보내도록 매일 밤 광장으로 나와 촛불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얼마 전 작고한 영국 작가 존 버저는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앞두고 쓴 한 에세이에서 미군의 가공할 무기로 곧 폐허가 될 그 곳, 바그다드와 세계 여러 도시에서 사랑을 나누는 젊은이들, 요리를 하는 가족, 하이데거를 읽고 있는 노동자의 모습과 일상을 그린 후, 미국의 지배자는 이들의 동의 아래 전쟁을 치룰 계획을 갖고 있는지를 묻는다. 그렇지 않다면 당시 미국의 대통령 부시는 민주적 통치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의 약속은 지배받는 사람들의 의사를 묻고 그들의 동의에 입각해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존 버저는 미국의 침략 전쟁에 직접적인 피해를 볼 이라크 사람들 뿐 아니라 세계 시민들로부터 전쟁이라는 정치 행위의 승인을 받았는가를 묻고 있다.
하물며 미국의 거대 군수업체와 미제국의 패권전략의 희생자가 될 성주와 김천의 주민들에 대해 민주적 위정자로서 어떤 정치적 입장을 지니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 선택지 하나는 국가 간 협정이라는 이유로 그것을 존중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으니 지역 주민들을 회유하거나 피해 감수를 강요하는 것이다. 또 다른 선택지는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지역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주권자들의 의지와 지혜를 모아 미국과 재협상에 나서겠다는 것, 그것이 권력을 위임받은 공직자로서의 책임윤리를 다하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나는 후자의 태도를 보이는 그런 정치인을 우리의 대표자로 두고 싶다.
[이승렬 칼럼 2]
이승렬 / 영남대 영문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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