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홀린 날"

평화뉴스
  • 입력 2007.09.14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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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유지웅(평화뉴스)
"밤길 새벽길..시련은 추억으로 다시 사람을 향한다"


전라도 지리산휴게소에서 10분쯤 갔을까. 잘나가던 승용차가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멈춰섰다.
보험회사 출동서비스로 배터리를 충전했지만 시동은 금새 꺼져버렸다. 다시 20분을 기다려 견인차량이 왔고, 우리는 남원시 어느 카센터로 견인됐다.

카센터에서 1시간 넘게 시간을 끌었다. 겨우 고쳤나 싶더니, 카센터를 나선 지 불과 50미터도 못가 또 멈춰섰다. 끙끙거리며 다시 카센터로 차를 밀어넣었다. 짜여진 몇몇 일정 때문에 더 기다릴 수 없어, 카센터 인근에서 렌트카를 빌려 2시간 가까이 고속도로와 지방도로를 달렸다.

물어 물어 겨우 약속된 사람을 만난 뒤 다음 장소로 찾아가던 길, 낯선 시골 지방도로에서 렌트카마저 멈춰섰다. 이번 역시 모든 전원이 꺼졌다. 기가 막혔다. 렌트카마저 퍼지다니...시간은 밤 10시를 넘었다. 농촌이라 온데 불빛 마저 보이지 않았고, 난생 처음 온 이 곳이 어디쯤인지 알 수도 없었다. 다음 약속은 고사하고, 핸드폰 배터리마저 갈랑갈랑해 초조함은 더 커졌다.

때마침 저 멀리 보이는 차량 불빛,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마구 달려가 oo군 oo면 oo리 어디쯤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 말을 외우고 외워 렌트카업체와 보험회사로 연락해 읍내까지 겨우 견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밤이 늦어 문을 연 카센터가 없었다. 다행히, 견인차량 운전사가 ‘아는 형님’을 깨워 겨우 고칠 수 있었다. 그때가 밤 12시쯤. 그제서야 10시간 전쯤 지리산휴게소에서 먹은 우동 한 그릇의 기억과 함께 무진장 배고픔이 밀려왔다.

오후 2시에 고속도로에서 시동이 꺼졌으니 딱 10시간 만이다. 한숨 섞인 밥을 먹고 다시 다음 약속장소로 향했다. 밤 늦도록 멀리서 온 손님을 기다리기에 잠깐이라도 들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두운 밤길, 굽이굽이 헤매며 산길을 돌아 겨우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 다시 남원으로 가야 한다. 렌트카를 돌려줘야 하고, 카센터에 맡긴 내 차도 찾아야 대구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고속도로 위에서도 몇번을 헤맸다. 신기하게도 고속도로에도 갈림길이 나오고, 뭔가에 홀린 듯 가는 길마다 여기가 아니었다. 하루종일 비는 오락가락. 그야말로 안개낀 새벽길, 정말이지 몇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 차가 또 멈춰서면 어떡하나...불안.초조.막막 자체였다.

그래도 길은 돌고 도는 법. 어떻게 왔는지 새벽 3시가 넘어 남원에 도착했다. '남원' 푯말이 그렇게도 반가웠다. 렌트카를 주인에게 돌려줬다. 이런 부실한 차를 빌려주는 주인이 한없이 밉고 원망스러웠는데, 막상 새벽길 돌아 만난 주인에게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돌아왔으니 다행이기도 했고, 처음 본 사이지만 악연을 만들기 싫었다.

그제서야 쓰러질 듯 몸이 무거워졌고, 우리는 찜질방에서 1시간 남짓 눈을 붙였다. 그리고 아침 6시가 조금 넘어 카센터에서 내 차를 찾아 대구로 출발했다. 무겁게 내려지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겨우 겨우..돌아오자 정오가 다 됐다.

하루에 두번 차가 퍼지고 밤길 새벽길 헤매고 또 헤맨 날. 귀신에 홀린 듯 악몽에 시달린 듯 멍하니 오후를 보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지역 기자들과 저녁을 먹는데, 대구의 한 아파트 주차장 도로가 폭발했다는 급한 연락이 왔다. 지하에 매설된 오폐수 정화조가 터졌다고 한다. 기자들 모두 현장으로 쫓아갔다. 그 아파트는 내가 사는 곳이었다...우리 아파트 바로 앞, 내 차와 사고현장은 불과 10미터가 채 되지 않았다. 아찔하기도 했지만, 연이틀 뭔가에 홀린 듯한 악몽에 어처구니 없고 또 기가 막혔다.

여기서라도 끝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십 수년 만에 처음으로 접촉사고를 냈고, 사무실에는 가을 폭우에 비가 뚝뚝 새 천정을 뜯어내야 했다. 사무실을 옮기려니 그 돈에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겠고, 참고 지내려니 서글픔이 밀려왔다. 전라도를 다녀온 지 보름이 지나지 않은 동안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이 짧은 기간동안 이런 저런 일들로 말 못할 마음고생도 많았다.

너무 기가 막힌 일들. 다시 처음으로 시계바늘을 돌려봤다.
전라도에 가게 된 건 그 사람의 갑작스런 제안이었다. 여름내내 휴가를 갈 수 없는 나를 안스럽게 여겼던 그는, 업무 때문에 혼자 전라도 곳곳을 돌아야하는데 바람 쐴 겸 같이 가자고 했다. 나를 위한 그의 배려였다. 나는 그의 마음이 고마워 "내 차로 모시겠다"고 큰 소리쳤다. 그에 대한 나의 배려였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차량이 두 번이나 퍼지고 밤길을 엄청스레 헤매야 했다. 나는 그에게 너무 미안해 할 말을 잊었다. 그러나 그는 일정에 쫓기면서도 짜증 한번 내지 않았다. 그 역시 나를 위한 배려 아니었을까..

나는 가끔 내게 닥쳐오는 시련의 종류를 모르겠다.
좀 할만하다 싶으면 뭔가 터지고, 이제 됐다 싶으면 뜻밖의 일로 마음고생을 해야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그렇지 않을까. 또 귀신 홀린 듯 기 막혀하며 지낸 날이 어디 그때 뿐이었을까.
인생사 먼먼 길, 어쩌면 그 길 내내 뭔가에 홀린 듯 좌충우돌 지낼 수 도 있다. 다만, 당장에 느끼지 못할 뿐.

그렇게도 쏟아지던 빗줄기가 그치고, 모처럼 파란 가을 하늘 흰 구름이 선명하다.
지독스런 악재로 귀신 홀린 듯 지냈지만, 나는 아무데도 다치지 않았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힘든 날 지친 날, 곁에 있어 준 사람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시련은 추억으로 다시 사람을 향한다.
한번 홀렸다 깨어난 가을 하늘이 너무 맑다...







[주말 에세이 53]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pnnews@pn.or.kr / pnnews@hanmail.net


(이 글은, 2007년 9월 8일 <평화뉴스>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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