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적 좁고 어둡고 긴 비밀터널을 지나면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판타지에 푹 빠진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이가 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등산을 하다가 산꼭대기쯤에서 몸 하나쯤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바위틈을 보면 나는 그 틈을 헤집고 저쪽 편으로 빠져나가고 싶은 알 수 없는 충동에 빠진다. 바위틈 저쪽 편으로 넘어가면 미지의 아름다운 세계가 꿈처럼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환상 때문이다.
최근에 출간된 하루키의 소설 '1Q84'는 이러한 환상의 세계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소설의 여자주인공은 고속도로 상에 나있는 비밀터널을 우연히 통과하게 되고 그러자 세계는 1984년에서 1Q84년으로 뒤바뀌어 버린다. 1Q84년에는 두 개의 달이 떠오르고 1984년에는 도저히 만날 수 없었던 두 연인이 마침내 해후하게 된다. 무엇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판타지는 만화영화 ‘라이언킹’이다. 어린 사자 심바가 바위굴을 통과하여 언덕에 올라설 때 마치 꿈에서인듯 순식간에 파나로마처럼 아래에 펼쳐지는 그 황홀경의 아름다운 초원의 모습은 내가 등산 중 바위틈에 끼여서 끙끙거리며 저 쪽 편으로 통과하기 위해 발버둥질 할 때 동경하는 바로 그 환상의 세계다.
이쪽 편의 세계에서 저쪽 편의 또다른 세계로 뛰어넘기 위해서는 비밀스럽기도 하고 또한 고통스럽기도 한 좁고 긴 동굴을 지나야하는 것은 모든 판타지의 기본적인 플롯이다. 해리포터가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가기 위해서 런던 킹스크로스 역의 9와 3/4의 비밀 승강장에서 기차를 타야만 하는 것도 마찬가지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은 판타지뿐만 아니라 무릇 모든 생명의 탄생과 성장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어미의 뱃속에서 세상에 태어나는 생명은 어둠의 동굴을 통과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어디 이뿐인가. 갓 태어난 생명이 자라나 온전한 성인체가 되기 위해서도 유사한 형태의 통과 제의를 반드시 겪어야 한다. 알에서 깨어난 유충은 고치 속에서 긴 어둠과 정지의 시간을 거쳐야만 비로소 화려한 날갯짓을 할 수 있는 나비가 된다. 이를 이화(異化)라고 한다. 인간은 나비와 같은 변태 과정을 거치지는 않지만 어린 아이는 사춘기라는 비밀스러운 이화의 과정을 통과해야만 저쪽 편에 있는 성인의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곱씹어 생각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거대한 전환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좁고 어둡고 긴 비밀터널을 통과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좁고 어둡고 긴 비밀터널’은 반드시 물리적인 실체로 간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깊은 내면의 성찰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비밀 터널은 이전의 그 어떤 누구도 혹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밟아보지 못한 미지의 길이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인고의 고통을 참아내며 새로운 길을 밟아 나갈 때만이 거대한 전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대구경북이 지금 거대한 전환을 꿈꾸고 있다. 첨단복합의료단지 유치에 따라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논의되고 있다.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에 대해 지역주민이 환호하는 것은 이를 통해 대구경북이 사람이 중심이 된 지식기반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다. 대구경북은 산업화 초기에 한국사회 경제발전 전체를 이끄는 중심 공업화 지역이었다. 그러나 산업화 후기에 들어서 신성장동력의 육성에 실패하고 끝없는 나락의 기로에 접어들고 있다. 첨단의료복합단지 유치는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대구경북이 경험한 영욕의 역사를 딛고 마침내 탈산업화 시대로의 거대한 전환을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대구경북이 탈산업화 시대로 건너뛰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여야 한다. 비장한 결단이 필요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사실은 이제까지 언급한 바로 그 낯설고 익숙지 않은 비밀터널을 통과해야만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거대한 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생략하거나 혹은 우회할 수 없는 길이다. 그 비밀터널은 이제까지 대구경북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이리라. 그 비밀터널을 통과하기까지 예상치 못한 난관과 실패를 경험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미지의 새로운 길을 무사히 통과해낼 때 대구경북은 지식기반사회로의 진입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
대구경북은 지금 바로 그 비밀터널을 통과하는 중인가? 초기 산업사회의 성공의 경험을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이제까지 걸어 온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중앙정부와 연결된 돈 줄이 거대한 전환을 위한 비밀통로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중앙정부와 연결된 돈 줄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과거로 가는 길은 실패의 길이다. 지식기반사회로 넘어가는 비밀 통로는 반드시 새 길이어야 하고 미지의 길이다. 해리포터가 마법학교로 가기 위해 9와 3/4의 비밀 승강장에서 기차를 타듯, 우리도 지식기반사회로 가기 위한 비밀통로를 내밀한 방식으로 찾아내어 주저함이 없이 통과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지식기반사회로 이끄는 그 비밀통로가 아닌 것 같다. 모든 것이 옛날 방식으로 너무나 익숙하여 불안하다.
[김영철의 경제읽기 22]
김영철 / 계명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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