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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울한 시대,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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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 칼럼] 자립과 분열의 깃발들만...대안 정치의 가장 큰 사명은?

 
암울한 한해였다. 새해 벽두부터 용산참사가 있었다. 누구를 위한 공권력이고 무엇을 위한 개발인지 근본적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정치철학적 사건이었다. 죽은 이들이 눈도 제대로 감지 못했건만 봄이 오자 새싹들은 어김없이 솟아났고 꽃들은 흐드러졌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인간미 넘치던 전직대통령이 자살로 내몰리는 흉흉한 사건으로 온 나라가 뒤흔들렸다. 민주화운동을 상징해온 또 한 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그 충격으로 타계했다. 그가 활짝 열어놓은 남북의 통로는 한번 끊어지자 이어질 줄 모르고 있다. 큰 전쟁 없는 것만으로도 다행인 줄 알아야 할 것 같다. 그 와중에 정권의 언론장악은 막무가내로 진행되었다. 헌재까지 궁색한 논리를 내밀며 들러리를 섰다. 죄 없는 KBS 사장이 임기도 못 채운 채 쫓겨났고, 비판적 언론인, 지식인들만 아니라 백수 네티즌마저 터무니없는 보복성 인사와 송사에 시달렸다.

반서민, 더 암울한 정치적 불신

누가 죽어나가든, 언론이 물구나무를 서든 경제만 살리면 다 용서받을 수 있나보다 하자. 허나 세금까지 감면받아 더욱 잘나가게 된 극소수 최상위층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경제는 별로 살아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듯하다. 시장판 어묵이 서민경제를 대변해주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친서민 이벤트는 예년과 다름없이 풍성했다. 현란한 친서민의 구호 아래 반서민 정책들은 착착 집행되었다. 국민들 절대다수와 작은 물고기들까지 반대하는 4대강 콘크리트 공사에 몇 십조씩 퍼부을 심산 때문에, 서민을 위한 복지예산은 대책 없이 잘려나갔다. 대학등록금 반값 공약 같은 것은 애당초 기대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구직난이 최악이라는데,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 지지선언까지 한 대학생 대표들은 어디서 정규직 자리 하나 얻었는지 소식이 묘연하다. 양극화 따위의 고급스러운 문제의식은 정치권에서 슬그머니 실종된지 오래다.

반서민 정책보다도 국민들을 더 암울하게 만든 것은 이명박 대통령이 자초한 정치적 불신이다. 불신의 이유는 많고 뿌리는 깊지만, 그 결정판은 세종시다. 세종시는 이제 국토균형발전이라는 원래의 정치경제학적 논점을 한참 벗어났다. 표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거짓말도 할 수 있음을 공공연히 털어놓는 이명박 식 솔직함 혹은 뻔뻔함의 생생한 물증이 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아쉬우면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있고 필요하면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다는 사실을 충청도민들만 아니라 대다수 국민들의 의식 깊숙이 새겨놓았다. 어떤 약속이나 다짐도 희망과 기대가 아닌 냉소와 혐오부터 불러일으키는 상황에서는 대화도 합의도 겉돌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생존권을 지키려는 국민들을 상대로 이명박 정부가 전격 진압작전을 펼쳤듯이, 국민들도 정권을 진지한 대화상대자가 아니라 냉소의 대상으로 대하는 편이 오히려 속 편하게 되었다. 정부가 민심을 저버리는 정책을 밀어붙일 때마다 여권 표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반겨도 되는 것이다.

자립과 분열의 깃발들

지금의 반민주 반서민 정치를 넘어서는 일에 앞장서야 할 분들을 향해서도 냉소만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들도 아직까지는 국민의 신뢰를 별로 얻지 못했다. 이름부터 해괴한 친박연대나, 한나라당과 ‘원조’ 경쟁을 벌여온 자유선진당은 논할 필요도 없겠지만, 야권의 어느 세력도 단독으로 대안세력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공조 내지 통합이 순탄하게 이루어질 것 같지도 않다. 자립과 분열의 깃발들만 거세게 펄럭인다. 허나 민노당과 진보신당도 그렇거니와 민주당과 국민참여신당 혹은 창조한국당 역시 인맥과 주도권의 문제를 떠나 서로 얼마나 다른 정치원칙이나 노선 혹은 정책으로 국민들을 흡인할 수 있는지, 야권 내부의 차이가 정말로 반민주 반서민 세력과의 대결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사실은 그 동안 이명박 정부의 괴로운 정책 때문이라기보다 그 대안이 잘 보이지 않아서 특히 암울했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

인류사 속에는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더 처참하고 암울했던 시절들이 수없이 많았다. 독일 작가 바이스의 소설 [저항의 미학]은 우리를 인류사적 잔혹의 한 절정인 파시즘 치하의 독일로, 내전 속의 스페인으로, 망명지 스웨덴으로 안내한다. 당시 파시즘에 저항했던 인물들의 모습에서는 배울 것이 있다. 극심한 탄압 앞에서 그들은 단결했지만, 조금 덜 위험한 시기에는 미움과 분열이 난무했다. 불의와 착취에 맞선 투쟁 뒤에서는 특히 남자들 사이에 경력과 출세를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이들의 상호공격과 배제와 패거리 형성도 조직의 요구나 대의에 따르는 것으로 포장되었지만, 이 내부권력투쟁은 외부의 적에 맞선 투쟁만큼이나 광폭했다. 그만큼 운동의 통일도 어려웠다.

대안 정치의 가장 큰 사명

그러나 모두가 이를 악물고 권력투쟁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최상의 인물들, 조직가들, 전략가들이 이름도 없이 싸우다 파시스트들에게 검거되어 수용소로, 감옥으로 끌려갔고, 소신을 혹은 동지들을 지키기 위해 고문당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처형당했다. 당간부들이 대대적으로 검거되는 상황에서 로스너라는 인물은 홀로 은거하며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저항운동의 기관지를 꾸준히 발간한다. 비숍이라는 여인은 파출부 일을 하면서 필요할 때면 운동현장 어디든 나타나 온갖 작은 일들을 해내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덕분에 끝까지 살아남는다. 그녀는 중요한 인물들 대신 자신이 살아남은 데에 수치를 느낀다. 그러나 그녀는 ‘저항하라’는 한 마디 말을 길모퉁이에 승강장에 스탬프로 찍어놓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했다. 작중 일인칭 화자는 겸손한 그녀를 성자에 비유하고 싶어 한다.

그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징후가 희망과 대립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움켜쥐고 이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으리라고, 희망이란 다름 아닌 생명력 자체이기에 언제나 희망이 좌절보다 강하다고 … 물론 신자유주의 무한경쟁의 사다리 끝자락에 매달린 채 아무 저항도 못하는 좀비의 삶은 희망과 거리가 멀 것이다. 허나 비숍처럼 목숨까지 걸지는 않아도 크고 작은 저항의 공간들은 어디서나 찾을 수 있기에 희망은 바로 우리 곁에 있다. 메시아는 먼 곳에 따로 있다가 어느 날 우리를 찾는 것이 아니다. 야만에 저항하는 한 누구나 메시아인 것이다. 대안 정치의 가장 큰 사명은 이 희망을 죽이지 않는 일이다. 이를 위한 최선의 길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정치 활동가들이 성자처럼 겸손해지는 것이다. 위선 떨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작은 기득권, 앞장서서 봉사할 수 있는 특권조차 필요하면 포기하라는 이야기다. 그 때 비로소 대안정치는 통합을 넘어 진정한 대안으로 피어날 것이다.





[홍승용 칼럼 45]
홍승용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garam20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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