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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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희림 /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아직 찾아오지 않은 그 어떤 확신이여, 속도여


 제가 사는 시골에서 기차를 탑니다. 시골이란 말 참 좋지요. 눈의 낚싯대로 창밖의 바람을 낚을 곳이란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가 제격이더군요. ‘흔들리지 않는 것이란 없다’ 라는 믿음이 오직 구걸일 뿐인 것처럼 차창이 벙어리 입술처럼 달싹달싹 거립니다.
 가슴께 눈 쌓인 겨울나무 백여 그루 낚아 올리니 이름 모를 간이역에서 지상의 서늘한 사람들 기차에 오릅니다. 주눅 든 이정표 살 속을 파고드는 눈가루 사이로 驛捨를 빠져나가는 꽁무니들은 단물 흐르는 대지의 젖가슴에 마른 입술을 대려는 듯 살박거립니다 일감이 뚝 끊기고 영하의 날씹니다만 오늘이 벌써 입춘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경조사와 희로애락 줄어 씨 마르는 소리 찬 살갗으로 애도는 쭈그렁 호박 같은 집들을 지납니다. 문전옥답이었을 빈 들 끝 무렵, 푸른빛 교회당 양쪽의 십자가 두개는 내세와 외계의 입맞춤 주홍글씨로 떨고 있습니다.
 고개 숙여 밥 떠 넣듯 하늘 아래 상 차린 주마간산들, 겨울나무 눈커풀, 까마귀의 알, 어디선가 번득였을 무당의 칼끝,  타닥 타닥 타들어가는 아궁이같은 식솔, 두두물물인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삶과 시가 오롯이 하나인 홍일선시인의 시 한편을 떠올립니다.
  
어머니
나라의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서라도 쌀 수입만은 꼭 막겠다던
그 사람들 말 믿지 않았지요
어머니 당신은 오직 땅만 믿었지요
아직 근력 있을 때 들에 나가는 것을
덕 쌓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한 뼘의 땅이라도 놀리는 것이
하늘에 죄 지으시는 거라고
마당 귀퉁이 빈 터에도
서리태콩 심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당신이셨습니다
어머니
이화명충 여뀌 독새풀보다도 더 무서운 게
암보다 더 무서운 게
머리 검은 인종들이었다고
손주들에게 일러주는 것이
큰 죄 짓는 것 같다며 안쓰러워하던 어머니
새댁 때 처음 논에 들어갔을 때 발가락 사이
꼼지락거리는 우렁이 올챙이 물방개가
피붙이처럼 정다웠다면서요
수원 장날 참외를 팔러 나갔다가 다 팔지 못해
우두커니 남문상회 불빛만 바라보는데
팔달문 앞에서 친정오라버님을 만났지만
약주 좋아하시는 오라비를
그냥 빈손으로 보내신 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는 어머니
그날 당신의 그 마음이
우리나라 아픈 농업이었습니다
논의 마음이었습니다
밭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 농민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16년 만에 펴낸 세 번째 시집(『흙의 경전』)이란 시집을 펴낸 바 있습니다. 이 시집에 대해 고은 시인은 “시인과 농사꾼은 한 가지야. 말을 다루는 것과 땅을 모시는 것이 일맥상통하니까. 내가 당신 시집 한 숨에 다 읽었어. <聖시화호>까지 말이야 대단해! 이런 작품들을 귀하게 잘 다루어야 해.” 라고 평가한 바 있습니다.

 백무산 시인은 “시인의 첫 마음으로의 회귀는 가난하고 작지만 가장자리에 서는 일이다. 그곳에는 위계와 척도와 부와 지배의 힘을 파괴하는 빈자의 혁명의 역사가 있다. 그래서 그 가장자리에는 눈물 그렁그렁한 사람들이 있고,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시인이 있고, 눈물 많은 어머니가 있고, 읽어도 읽어도 다 읽을 수 없는 흙의 경전이 있다. 붉은 밑줄 그어 표해 두었으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그 구절로 나도 이제 돌아가련다 <가난 아닌 것 다 거짓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나라에 다시 봄이 오고 있습니다. 하찮은 미물인 시인으로서 세상에 대해서는 늘 미력하여 몇 마디 시어가 창백한 나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나 어제의 숨결 갈아 엎고 새 세상 텃밭인듯 오해 하려 합니다. 하얀 독기로 먼지 없는 몸으로 天地間, 낫 한자루 붓 한자루 되려 합니다. 외딴 풀밭을 얼굴 붉은 농부처럼 다듬어 누군가는 읽고 누군가는 영영 읽을 수 있는 書記가 되려 합니다.
 
 기름기같은 식탁, 떡국으로 출발하는 새해의 아침에...
새해 아침이면 늘 맞절을 해오는 느리게,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아직 찾아오지 않은 그 어떤 확신이여
그것의 속도여,





[주말에세이]
고희림 / 시인. 99년 작가세계로 등단. 03년 시집 <평화의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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