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발생한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비극은 ‘미국 문명의 위기’를 상징하기보다는 지난 20여 년간 계속된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2005년 한국을 방문한 하버드대학교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당시 한국철학회 주최 다산기념철학강좌의 기념강연에서 했던 한 대목이다. 이 강연에서 샌델 교수는 “허리케인이라는 자연의 재앙이 곧 인간의 재앙으로 이어지는 비극적인 장면을” 말하면서 “이 인간의 재앙의 직접적인 계기는 허리케인이었지만, 그 근원에는 하층 계급 특히 흑인 계층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은 부시 정권의 신자유주의”가 버티고 있음을 지적했다.
연대가 무너진 곳의 비극
샌델 교수는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서로 연대하기 위해서는 교육, 의료, 복지 서비스 등 삶에 필요한 기본 요소들이 계층, 인종을 초월해서 평등하게 제공돼야 한다”면서 “가난한 사람들, 흑인이라는 이유로 이런 것들까지 제공받지 못한다면 연대성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지적했다. 덧붙여서 그는 “만약 미국이 북유럽의 복지국가들처럼 삶에 필요한 기본 요소들이 빈부, 인종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공급되는 사회였다면 극도의 위기 상황에서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는 뉴올리언스의 비극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대가 무너진 곳에 필연적으로 찾아오는 것은 민주주의의 붕괴라는 비극이었다. 민주주의는 소외를 최소화할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겪은 지난 2년여의 좌절과 고통도 연대가 무너진 곳에 똬리 튼 신자유주의라는 인간의 재앙과 맞닿아 있다. 민주주의가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피대표자에 대한 대표의 구성적 과잉이다. 과잉은 비극을 낳는다. 전직 대통령과 그 정부 참여자에 대한 원한에 찬 보복 정치, 국민의 생명권을 무시한 광우병 소 수입, 특정 기업에 특혜를 주기 위해 군사안보를 무시하며 항공로를 변경하는 정책, 맹목적인 성장주의자들의 개발 정책이 부른 용산 참사, 안보 무능으로 46명의 젊은 피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천안암 침몰, 4대강 삽질에 저항한 한 스님의 죽음으로 이어진 비극들의 근원에는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가속화와 더불어 민주주의의 퇴행이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사회의 경제 파이를 늘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부자감세를 하고 사회복지나 고용을 희생해도 좋다고 주장한다. 이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 논리에 근거한다. 리처드 체니 전부통령이 미국을 겨냥한 테러 공격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면 알카에다 테러리스트 용의자에게 강력한 고문을 가해도 좋다고 주장하면서 비빈 언덕도 공리주의였고, 미국과 유럽이 가난한 자들을 감옥에 처넣은 뒤 그들의 운명을 민간업자에게 맡겨버리면서 동원한 논리 역시 공리주의였다.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는 각종 정책들, 부자감세, 4대강 삽질, 세종시 문제, 경쟁주도의 교육정책 등도 공리주의에 기대고 있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공리주의 추종자와 그 반대세력이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장-뤽 낭시가 “민주주의란 주어진 그 어떤 목적도, 하늘도, 미래도, 그 모든 무한도 없는 상황에 노출된 인류의 이름”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떤 확정적 규정도 없는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끊임없는 도전과 재발명을 요구하는지도 모르겠다.
진보.개혁, 상패를 내던질 준비를 해야
그래서 이번 지방선거의 결과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검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는 아니었을까 싶다. 흘러간 유행가처럼 “잃어버린 10년”을 선동하며 지난 10년간 지속되어온 인권중시, 지방분권과 지역균형발전, 남북평화공존 등의 정책을 일거에 부정했던 이명박 정권에 국민들은 엄정한 심판을 내렸다. 국민들은 권력자가 훈계하고 가르쳐서 끌고 가야 할 무지렁이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 공통의 관심사를 실현할 행동양식을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진보·개혁진영이 연대해서 만들어낸 연합정치의 승리로 나타났다. 연대의 내용, 기준, 절차 등에 일단의 문제점과 부족함이 있었으나 진보·개혁진영이 연대하면 보수·수구 집권세력을 이길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선거의 결과로 우리의 민주주의적 감수성이 높다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축배는 아직 이르다. 우선 지금, 여기 우리에게 주어진 민주주의가 유의미해지려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권력을 제조하는 데 더 다가서야 하며, 상패처럼 주어진 자유를 내던져야할 필요가 있다. 기업권력이 인민의 정치적 지배라는 민주주의의 약속과 실천을 침식하고 있다. 기업과 국가의 권력이 융합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노무현 정권과 삼성의 교차를 넘어선 융합을 경험한 바 있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진보·개혁진영은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고, 선택했는지를 곰곰이 되새겨야 한다. 진보․개혁진영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의 상패를 내던질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혁신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정치의 출발점이다.
정치는 다른 형태들, 즉 예술, 언어활동, 사랑, 사유, 지식 등을 개방하는 형식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는 그 다른 형태들이나 의미의 사용 영역이 꽃 필 수 있는 가능성을 쉴 새 없이 갱신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인터넷 공간에서 벌어지는 진보신당의 노회찬 대표와 관련된 논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노회찬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도 진보·개혁진영의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만의 정치적 결벽증...권력 제조에 다가서는 정치를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 안에 민주주의적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 시민과 우리가 원하지 않는 민주주의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드러나듯이, 서울 강남과 대구경북의 민심은 폐쇄적 공동체, 학연, 지연 혹은 혈연에 따라 계층화된 시민, 신자유주의의 공격적인 탈국가적 배치, 또는 민주주의적 과정과 제도를 회피하면서 사회적 질병을 치유하고 경제적 성장과 발전을 이루겠다고 약속하는 기술관료 체제에 몰표로 화답해 주었다. 이들은 생명다양성의 보존보다는 단기간의 편익을 추구하고, 평화보다는 전쟁을 추종하며, 집단의 번영을 위해 자신의 쾌락이나 증오를 결코 희생시키려 하지 않는 바로 그 시민들이 아닌가. 공적인 삶의 불편함보다는 사적인 이익의 만족을 신자유주의적 합리성으로 정당화하는 시민들이 아닌가.
루소는 타락한 시민이 공적인 삶을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타락한 시민을 민주주의자로 개종시키는 기획의 어려움을 이렇게 토로한 바 있다. “일반의지는 언제나 공명정대하고 항상 공익을 도모한다는 결론이 얻어진다. 그렇다고 시민의 의결이 언제나 한결같이 올바르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민주주의란 언제나 실현불가능한 거대한 이상일 뿐이라고 평가해 버리고 말 것인가? 국민들은 초조하게 기다린다. 적어도 진보․개혁진영의 사람들은 답변을 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만의 ‘정치적 결벽증’ 또는 ‘정치적 자폐증’에서 벗어나 권력을 제조하는 데 좀 더 바짝 다가서는 정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이 정치의 시작은 연대이다.
[이재성 칼럼 19]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실장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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