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사회를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라고 가정할 때 우리는 표면적으로 우리 자신을 의식과 생각을 가진 자유롭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행위자로 여기지만 사실은 전혀 그럴 수 없음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최근 한국 사회는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으로 논란을 빚고 있다. 국민 모두를 경악시킨 자는 바로 이인규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이라는 인물이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공직자와 공기업 직원의 비리를 조사하게 위해 설치된 총리실 공식부서로서 민간인은 절대 조사해서는 안 되는 조직이다. 그럼에도 이 지원관은 민간인 불법사찰을 권력의 이름으로 감행했다.
일상을 감시하는 이 시대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이 언론에 보도되자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은 지난 7월 2일 “(조사를 받은) 김종익씨가 민간인인지 몰랐다”는 후안무치함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지원관은 “총리실에서 김씨를 조사할 때는 민간인 신분인지 몰랐다”면서 “조사가 끝난 뒤에 민간인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경찰에) 이첩”했다는 궁색한 변명만 늘어놓았다.
만일 민간인 사찰이 사실이라면 이는 직권남용으로 국가배상의 문제까지 발생할 수 있는 중대 사안이다. 형법 123조(직권남용)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사태는 지난 2009년 8월 12일에도 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국외 의원회관에서 국군기무사령부가 민간인을 미행하고 촬영하는 등 대규모 불법사찰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신체를 권력이 요구하는 엄격한 규율과 훈련에 길들이려 할 뿐만 아니라 미세한 정보의 그물망 속에서 일상의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하는 사회에서 궁핍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사회를 진정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라 부를 수 있을까. 스스로를 의식과 생각을 가진 자유롭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행위자로 간주하는 국민들의 신체를 감금하고 일상을 감시하고 처벌하려는 이 시대에 인간의 자유와 저항의 가능성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인간의 신체에 대한 권력의 작동방식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감옥의 탄생’이라는 부제와 함께 출판된 것은 1975년이다. 출간된 지 30여년이 넘은 이 책이 아직도 유효한 것은 우리 사회의 비극이다. 이 책은 좁은 의미에서 형벌의 이론과 제도에 대한 저자의 역사적 성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근대적 감옥의 출현과 함께 도입된 규율, 훈련, 교정, 관찰 등의 방법이 감옥 바깥의 사회에서 ‘어떻게 권력의 기술로 작동되는지’를 치밀하게 분석한 근대 권력에 대한 고발서이기도 하다.
푸코는 권력을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일방적인 관계로 간주한다거나, 권력자가 독점할 수 있는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권력을 한 사회 안에서 복잡하면서도 정교하게 작동하는 인간 지배의 ‘기술’과 ‘전략’으로 인식했다. 물론 그 권력의 전략적 목표는 인간의 ‘신체’였다.인간의 신체에 대한 권력의 작동방식은 시대마다 달랐다. 예컨대 왕권시대의 권력은 신체에 대한 잔인한 폭력이나 고문과 같은 ‘공포의 행위’로 권력의 존재를 과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근대의 권력은 감옥의 제도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감추면서 신체를 ‘부드럽게 통제하고 지배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다. 푸코는 처벌의 이러한 개선이 ‘죄수에 대한 인간적 처우를 개선해야 겠다’는 인식의 변화 때문이라기보다는 권력의 기술이 근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인간에 대한 권력의 ‘부드러운’ 지배방식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산출하는 공리주의적 통제 방법이다. 프랑스 대혁명 직후인 18세기 말에 감금이라는 형벌제도가 도입되면서 근대적 감옥이 탄생한 것도 바로 그런 논리에서 해석된다. 근대적 감옥의 대표적 형태는 공리주의자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Panopticon)이다. 이것은 중앙의 감시자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모든 죄수를 감시하는 구조로 만들어진 원형감옥을 뜻한다.
감옥 안에서의 감시자와 죄수들 사이의 관계는 감옥 바깥의 사회에서 권력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동일한 구조’를 갖는다. 예컨대 학교에서 모든 동작과 활동이 온갖 시험 장치를 통해 세밀히 규제되고 기록됨으로써 학생은 엄격한 규율에 길들여지고 순응되듯이, 군대나 공장의 규율과 통제의 장치 속에서 군인과 노동자들이 예속화되는 현상도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규율을 내면화한 결과물이다.
낱낱이 감시하고자 하는 권력...우리의 자유와 저항선은?
한마디로 인류의 역사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감시의 역사였다. 여기에는 불평등한 현실이 깊게 반영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감시는 무엇보다 권력의 요청이다. 권력의 정치적 속성, 즉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사회는 감시를 필요로 하며, 모든 권력은 규율의 내면화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감시 자체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를 구분하는 기준일 수 없다. 국민 통제는 근대적 감시의 실질적 출발점이다. 모든 근대사회가 감시사회인 이유다.
앤서니 기든스와 같은 사회학자는 ‘정보에 대한 통제’와 ‘사회적 관리’라는 관점에서 감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감시의 ‘행정적 기능’에 우선 주목하는 전략이다. 이와 함께 우리가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행정적 기능이 정치적 지배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국가는 행정적 기능을 위한 감시제도를 언제나 정치적 지배의 도구로 활용한다. 그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이번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이 아닌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감시의 내면화가 일상생활 속에서 촘촘하고 미세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감시의 내면화로 인해 모든 국민은 기존의 법과 질서를 일종의 ‘자연법’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사회 안정이란 권력 앞에 ‘순치’된다. 정보기술의 발달은 감시의 정도와 범위를 한층 강화하고 확장시킨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존재를 그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감시하고자 하는 권력 앞에서 과연 우리의 자유와 저항선은 어디쯤에 있을까.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스스로를 의식과 생각을 가진 자유롭고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행위자라고 할 수 있을 때 우리의 자유와 저항선의 위치가 분명해 질 것이다.
[이재성 칼럼 20]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실장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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