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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사회에 숨겨진 폭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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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부로 축적된 '쓰레기 내각'...그들에게 도덕적 가치는 없다"


오는 25일이면 이명박 정권이 반환점을 돈다. 현 정권의 2.5년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곧 나올 것이다. 이미 정치인들은 공과를 나누고 있다. 현 정권 창출의 공신 중 한명인 한나라당 권택기 의원은 “현 정권은 세계 경제침체의 와중에서도 선제적 경제회복 대책을 추진해 건실한 경제성장을 달성”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양극화를 극복하고 서민경제를 살리는데 주력해 정권 재창출을 이뤄낼 것”이라고 강변한다. 반면에 김대중-노무현 정권 기간 고위공직을 역임한 민주당의 이용섭 의원은 “이명박 정부의 2년 6개월은 계층간 지역간 갈등과 마찰이 어느 때보다 고조된 기간”이었으며, “신뢰와 정의, 청렴과 같은 사회적 자본이 황폐화되고 돈과 경제가 최고라는 물신주의가 팽배했던 기간”이었다고 비판한다.

누구의 진단이 맞을까? 아니면 옳을까? 전자는 맞고 틀림의 진리(혹은 사실)를 추구하는 문제와, 후자는 올바름과 올바르지 못함을 따지는 가치(혹은 당위)의 문제와 관련된다. 맞는 것이 올바를 수도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으며, 틀린 것이 올바를 수도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모든 판단의 핵에는 절대에의 항복이 숨어 있다. 절대적으로 ‘올바르다’거나 ‘맞다’고 믿는 것의 밑바닥에는 ‘내가 정의(또는 진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정의(또는 진리)가 나를 선택했고, 그것이 나를 이끌었으며,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는 사르트르의 ‘자기기만’이 똬리를 틀고 있다.

'공정한 사회' 약속

정치인들의 수사학을 벗어나 현 상황을 좀 더 객관화시켜 보자. 지난 8월 10일 인터넷신문 <레디앙>과의 인터뷰에서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선대인 부소장은 최근 정부가 주장하는 경기호전 상황을 이렇게 진단했다. 그는 현 정권의 경제정책이 “일반 가계를 희생시켜 국민 세금으로 부동산 버블을 지탱하고, 고환율 정책으로 서민경제를 어려움에 처하게 하면서 수출대기업에 보조금을 준 꼴”이라고 혹평했다. 이를 근거로 삼으면 권의원의 평가는 ‘사실’과 ‘가치’ 모두를 왜곡하고 있다. 그가 말한 ‘선제적 경제회복 대책을 통한 건실한 경제성장’은 일반 가계를 희생시키고, 수출대기업의 배를 불린 대가였다. 그 결과는 계층간 지역간 갈등의 고조와 돈의 신성화를 통한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였다.

여기저기서 쓴 소리를 많이 들었던 모양이다. 8.15 경축사에서 이대통령은 ‘공정한 사회’를 약속했다. 그가 말하는 공정한 사회란 첫째,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며, 둘째, 개인의 자유와 개성·근면과 창의를 장려하고, 셋째, 패자에게 또 다른 기회가 주어져 넘어진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일어선 사람은 다시 올라설 수 있으며, 넷째,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고, 다섯째, 승자가 독식하지 않으며, 여섯째, 지역과 지역이 함께 발전하고, 일곱째, 노사가 협력하며 발전하며, 여덟째, 큰 기업과 작은 기업이 상생하고, 아홉째, 서민과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사회이다. 새로울 것은 없다. ‘부를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오래된 답변이다. 역대 정권이 다 했던 좋은 말이고 옳은 생각이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무엇을 통해서 이런 공정한 사회를 만드느냐다.

'공인된 공포'의 확인

공공연히 공정한 사회를 말하는 정치권력은 국민들에게 규율과 법률의 준수를 요구하면서 이미 존재하는 국민들의 존재론적 취약성과 불확실성을 완화시켜주겠다고 약속한다. 이런 정치권력은 제약 없이 행사되는 시장권력에 의해 초래된 손실과 피해를 제한하고, 약자들을 지나치게 고통스러운 재난으로부터 보호하고, 불확실한 상황의 사람들을 자유 경쟁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약속으로 정당성을 확보한다. 정치권력의 공정한 사회 약속은 한마디로 ‘공인된 공포’를 확인시키는 정치적 재담에 불과하다.

현 정권에서 모든 사실과 가치의 기준은 경제에 저당 잡혀 있다. 물론 먹고 사는 문제를 내팽개치자는 소리는 아니다. 정치가 경제에 종속될 때 발생하는 문제들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정치는 경제에만 매달릴 뿐 ‘공동선’이 무엇인지를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경제가 정치를 밀어냈고, 정치는 더 많은 부의 축적을 위한 도구가 되었다. 정치가 상실된 곳에 부로 축적된 ‘쓰레기 내각’이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다. 이대통령이 지명한 내각 후보자들의 온갖 비리 부패는 말 그대로 통에 모인 쓰레기 같다. 위장전입은 기본에 부동산 투기, 탈세, 병역비리, 공무원 사적 사용 등 불법의 목록이 끝이 없다. 그들에게 좋은 삶은 잉여의 감정 소비, 즉 그들에게 도덕적 가치는 ‘쓰레기’일 뿐이다.

도덕적 가치는?

삶의 여정이 시장의 힘에 노출되는 현 상황에 많은 사람들이 지쳐 있다. 그들은 정치가 다루지 못하고 있는 정의, 청렴, 연대, 신뢰와 같은 도덕적 가치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 ‘좋은 삶이 무엇이냐’는 공동선을 고민하는 공동체의 미덕을 추구하는 사회를 희망한다. 그런 사회를 정치철학자 샌델은 ‘좋은 사회’라고 부른다. 그는 좋은 사회를 이루려면 실용주의를 내세워 전체 사회의 행복과 쾌락을 극대화한다거나, 자유주의를 앞세워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좋은 사회는 ‘부에 어떤 가치를 매길 것이냐’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4대강 사업으로 우리 사회의 재화가 극대화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해한다면 그 삶은 좋은 삶인가? 그리고 그 사회는 좋은 사회인가? 좋은 사회는 오로지 올바른 정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올바른 정치는 ‘좋은 삶’이라는 ‘도덕적 가치’를 목적으로 삼아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다. 도덕적 가치에 대한 진지하고 철저한 논의 없이, 경영하고 관리하려 드는 정치로는 그 어떤 민주주의 사회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럼에도 만일 우리가 개인의 안전이라는 공정한 사회의 건조한 약속에 만족한다면 공동선이라는 도덕적 가치가 실현되는 살가운 좋은 사회는 더욱 더 멀어질 것이다.





[이재성 칼럼 21]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실장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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