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자기할 수 있는 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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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변홍철 / "비틀거리면서라도 정의의 언저리를 향해 가는 여정이기를..."


2010년, 돌아보면 어떠신지요? 한 해를 보내며 대구의 8명에게 '소회'를 물었습니다. 조금은 특별한, 그리고 참 바쁘게 보냈을 '현장'의 사람들입니다. 헌 책방을 연 변홍철 '물레책방' 인문학연구실장, 새내기 기자로 첫 발을 내디딘 영남일보 김일우 기자, 창립 20년을 맞은 '예술마당 솔' 손병열 대표, 생존의 현장을 뛰어다닌 인권운동연대 서창호 상임활동가, 20년 주민운동에서 풀뿌리의회에 들어간 유병철 북구의원, 논란 속에 6.2지방선거 연대판에 선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김동렬 운영위원장, 4대강 사업 현장의 절절한 목소리를 전해 온 '낙동대구' 정수근 카페지기, 포화 속 한반도에서 여전히 '통일'의 꿈을 찾아가는 6.15대경본부 오택진 사무처장입니다. 이 글은 '물레책방' 변홍철 인문학연구실장의 2010년 소회입니다.


  사소한 일

  한 해를 돌아보는 자리에 서서, 묘하게도 기억에 또렷한 한 가지 일이 있다.
  아마도 지난 8월, 4대강 토건사업의 문제점을 다룬 MBC의 <PD수첩> “4대강 수심 6미터의 비밀”편이 방영되지 못한 일로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던 어느 날 저녁이었을 것이다. 내가 일하는 헌책방의 문을 닫고 퇴근할 무렵이었으니 시각은 거의 8시가 넘었을 때였는데, 수성경찰서 앞 인도에 내 또래로 보이는 한 남자가 조금 쭈뼛거리며 혼자 서 있었다. 이미 날은 어두워졌고, 그날따라 날씨가 몹시 더워서 그랬는지 행인들도 별로 없었는데, 이 남자는 양손에 두꺼운 종이를 한 장씩 들고 서 있었다. 설마 하고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는 지금 1인시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분지에 매직펜으로 휘갈겨 쓴 피켓의 내용 중 하나는 아마도 “PD수첩 불방, 이것이 민주주의입니까?” 정도였던 것 같다.
  이미 <PD수첩> 불방 이후 이에 분노한 많은 시민들이 ‘아고라’ 등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고, 여의도 문화방송 앞에서는 시민들이 촛불집회까지 열고 있을 무렵이었으니, 한 시민이 그런 주제로 1인시위를 하는 것이 사실은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적이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 첫 번째 까닭은 그 남자가 내가 보기에, 시쳇말로 전혀 ‘선수’(진보정당이나 시민단체의 활동가나 회원)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손으로 거칠게 휘갈겨 써서 만든 피켓의 모양새나 거기에 적힌 문구, 그리고 그의 표정과 행동거지 등이 한눈에도 ‘활동가’는커녕, 평소 집회나 시위에 참가해 본 경험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그런 ‘선수’라면 그 시각에 그런 장소에서 1인시위를 하는 것이 그다지 큰 ‘효과’가 없는 일이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아니 좀더 솔직히 말하면, 대구에서 이런 일로 저녁시간에 1인시위를 할 만한 내 또래의 ‘선수’라면 내가 그의 이름까지는 몰라도 얼굴조차 낯설 수야 있겠는가, 하는 시건방진 생각이 불쑥 고개를 들었던 것이다.    

  어쨌건 모른 체하고 지나칠 수가 없어서, 피켓의 내용에 대해 나도 동감하고 지지한다고 인사를 하고 나서, 실례를 무릅쓰고 혹시 무슨 일을 하는 분인지 물어 보았다. “이 근처에 사는 회사원인데 퇴근하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 하도 화가 나서 한잔 하고 이렇게 나왔다”는 것이었다. 많이는 아니지만, 과연 약간의 취기는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무슨 객기를 부리는 표정이나 말투는 전혀 아니고, 사뭇 진지하였다. 어쩌면 너무도 쑥스러워서 한두 잔 술의 힘을 빌려 이렇게 혼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면서, 내가 짐작한 대로 그 남자는 지극히 ‘소박한 분노’를 표현하지 않을 수 없어서 나온 그야말로 ‘평범한’ 시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때 내가 받은 느낌은 좀 복잡한 것이었지만, 가장 큰 느낌은 ‘부끄러움’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새로 문을 연 헌책방의 일이 너무도 바쁘다는 이유로, 시내 중심가에서 잇따라 열리고 있던 4대강 토건사업 반대 촛불집회나 그밖의 여러 항의행동과 집회에 거의 참가하지 못하고 있었다. 겨우 한두 번, 친구들의 권유에 못 이겨 강정보 공사현장 같은 데 따라가서 구경하다시피 둘러보고 돌아온 것이 전부였다. 내 처지가 그렇다면, 이 남자처럼 퇴근 후, 내 나름의 방법으로 의사를 표현하기 위한 노력을 해 볼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에 우선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물레책방 간판과 물레책방 내부 전경...2010년 4월 문을 연 '물레책방'은 기존의 '헌 책방'을 넘어 도심의 작은 문화공간으로 공연과 영화감상, 토론을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어가고 있다. (053.753-0423 / 수성구 범어동 수성경찰서 뒷 편) / 사진 제공. 물레책방
물레책방 간판과 물레책방 내부 전경...2010년 4월 문을 연 '물레책방'은 기존의 '헌 책방'을 넘어 도심의 작은 문화공간으로 공연과 영화감상, 토론을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어가고 있다. (053.753-0423 / 수성구 범어동 수성경찰서 뒷 편) / 사진 제공. 물레책방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내가 느낀 부끄러움의 뿌리는 더욱 깊은 것이었다. 고백하자면, 그 무렵 내 마음 깊은 곳에는 예전의 내가(적어도 2008년 ‘촛불정국’까지는)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것들 ― 변화를 위한 노력에 대한 냉소, 현실에 대한 무감각, 도무지 바뀔 것 같지 않는 현실 앞에서의 자포자기, 정신의 나태함―이 이미 견고하게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신의 타락


  리 호이나키는 『正義의 길로 비틀거리며 가다』에 실린 에세이 「또 하나의 전쟁」에서, 미국의 아나키스트인 애먼 헤나시의 비범한 삶을 소개하고 있다. 많은 일화들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피켓시위를 하고 있는 동안 그(애먼 헤나시)는,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 질문을 받곤 했다. “아뇨, 하지만 세상이 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확신합니다”라는 게 그의 대답이었다. (328~329쪽)

  이 문장은 내가 적어도 2008년 말까지, 말이나 글로 자주 인용하곤 하던 대목이다. 그러면서 나는 그 무렵까지 내가 열렬히 참가했던, 심지어 내가 나서서 조직하기도 했던 여러 항의행동들에 정당성과 ‘유머’를 부여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 여름 저녁, 수성경찰서 앞에서 외롭게 1인시위를 하고 있는 그 남자에게 나는 고작 “그렇게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는지” 묻고 있는 꼴이었다.  

  현대 아나키즘의 역사에 그(애먼 헤나시)가 끼친 공헌의 하나는 그가 ‘한 사람의 혁명(one-man revolution)’이라고 부른 개념과 그 실천 속에 담겨 있다. 나는, 만약 내게 용기가 있다면, 사람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오늘 당장 살기 시작할 수 있다. 나는 사회가 바뀔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방법은 자기 자신의 변화를 위한 시도이다. 이것이 ‘한 사람의 혁명’이다. 그는 그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고 믿었다. (327쪽)

  말하자면, 그 날 만난 남자는 자기 나름으로 ‘한 사람의 혁명’을 시작하고 있었던 셈이다. 비록 약간의 술의 힘을 빌려 나온 소박하기 짝이 없는 개인적 행동이라고 하더라도, 그 의미가 폄훼될 수는 없다.

  반면에, 개인적인 상황과 ‘정세’가 두루 ‘잘 나가던 시절’에는 한동안 ‘한 사람의 혁명’ 같은 고상한 말을 입에 달고 운동가연하면서 어설픈 ‘선동’마저 일삼던 다른 남자는, 시간(불과 2년도 안 되는 시간)이 흐른 뒤 이제 와서 개인적인 형편의 어려움과 ‘차가운 시대 분위기’를 탓하며 어느새 마음 속에 냉소와 무감각, 자포자기, 나태함 따위의 ‘치명적인 병’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 질병의 숙주가 되어버린 남자는, 올해 들어 친구들 덕분에 함께 시작한 사업에 대한 주변의 격려와 과분한 관심에 조금은 우쭐해져서, “지금은 거리에 나서 피켓을 들거나 소리를 지르기보다는 좀더 장기적인 관점을 가지고 안정적인 ‘진지’를 구축해야 할 때다”라는 제법 그럴듯한 논리로 자신의 냉담과 기회주의를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저 사람, 내가 모르는 사람인 걸 보니 ‘선수’는 아닌 모양이군” 하는 식의 오만방자한 생각을 잠시라도 했다는 것도, 나중에 돌이켜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정신의 타락’의 징후에 다름 아니다.

  그 뒤로 그 남자를 다시 만나지는 못했다. 잇따라 같은 시각 그 장소에 나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 하루로 끝난 1인시위인지 며칠이라도 더 이어졌는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한 해를 돌아보는 이 시점에서, 그 ‘사소한 일’은 내 기억에 이상하게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설령 그 빛이 반딧불만하다 할지라도

   
  돌이켜보면, 17년 동안 대구에서 발행되던 『녹색평론』이 지난 2008년 말 서울로 옮겨가면서, 그 잡지에서 10년 넘게 일하던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실직자’가 되었고, 2009년 한 해는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별러 왔던 귀농 ‘실험’으로 경북 의성의 시골 마을에서 얼치기 농사를 지으며 지냈다. 그러다가 시골생활을 힘들어 하는 아내와의 의견 차이도 있고, 무엇보다 현실적인 준비가 너무도 부족하다는 것을 뼈아프게 확인하고 나서 돌아와, 올해 초부터 다시 시작한 대구생활이었다. 그 와중에 퇴직금 잔고는 바닥이 보이고, 이래저래 새로 시작한 일은 분주했으니 2010년 한 해가 나로서도 녹록한 것은 물론 아니었다. 게다가 주변의 지지와 관심만큼 경제적으로도 수익이 있을 만한 사업은 아니기에, 생계에 대한 긴장과 불안은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여름, 거리에서 만났던 한 이웃 앞에서 내가 느낀 부끄러움과 자괴감의 근원은 그런 핑계로 결코 면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 이 사회를 휩쓸고 있는 암울함과 참담함을 직시한다면, 이 세밑의 어둠과 차가움 앞에서 감히 ‘희망’을 말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함부로 자포자기할 수 있는 권리가 나에게 없다는 인식은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무슨 ‘지식인의 책무’ 같은 대단한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을 논할 만한 자격도, 책임도 나에게는 없다. 그러나 처지와 정세 따위를 핑계로 ‘정신의 타락’과 ‘나태함’마저 스스로 용납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루쉰(魯迅)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으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부디 이 길이, 비틀거리면서라도 정의(正義)의 언저리를 향해 가는 여정이 될 수 있기를.

나는 중국의 청년들이 다들 차가운 분위기에서 헤어나
자포자기하는 자들의 그 따위 말을 들을 필요가 없이
오직 일로 발전해 가기만을 바란다.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일을 하고,
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소리를 내며,
열이 있으면 있는 만큼 빛을 내야 한다.

설령 그 빛이 반딧불만하다 할지라도
어둠 속에서 다소라도 빛을 뿌릴 수 있을 것이기에,
횃불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필요가 없다.

앞으로도 끝내 횃불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유일한 빛이 될 것이다.
만일 횃불이 나타나고 태양이 솟아오르면 우리들은 물론 기꺼이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아무 불평도 없을 뿐만 아니라, 같이 기뻐하면서 그 횃불과 태양을 찬미할 것이다.

(1919년)
* 루쉰 산문집, 이욱연 옮김 『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중에서








[2010 송년]
변홍철 / 물레책방 인문학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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