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이명박 대통령은 신년연설에서 경제와 성장, 일자리, 안보, 복지, 기업, 개발 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국가운영 철학이 ‘경제와 성장’에 맞춰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신년연설에서 강조했던 경제, 일자리 등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올해에는 변화, 개혁, 선진, 정치 등의 단어들이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거나 사라졌다. 한마디로 이 대통령이 2011년 국정운영 기조로 ‘정치·개혁’보다는 ‘경제·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얘기다.
약속이나 한 듯, 대기업들이 새해부터 한목소리로 ‘공격경영’을 외치고 있다. 먼저 삼성은, 사상 최대의 투자, 채용 계획을 밝혔다. 시설에 29조 9천억, 연구 개발에 12조 천억, 자본 투자에 1조 천억 원 등 모두 43조 원이나 된다. 현대자동차도 친환경 차의 연구개발을 중심으로 투자와 채용 규모를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SK 그룹은 아예 10년치 대규모 투자계획을 제시했는데 올해에만 기술개발에 8천억, 그리고 신자원 에너지, 스마트 환경 부문에 각각 4천5백억 원이 책정되었다. 이러한 주요 대기업들의 공격 경영은 다른 기업들의 투자를 이끌어 내고, 일본 등의 경쟁업체들을 따돌리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것이 시장의 분석이다.
오늘날 우리는 두 개의 유토피아 사이에 살고 있다. 한쪽에서는 무한성장으로 소비 천국을 실현하고자 하고, 다른 쪽에서는 자연을 구하고 지속가능한 미래를 꿈꾸고 있다. 우리는 이 모순적인 두 희망의 문화적 덫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을까? 지금까지 우리는 어디가 끝인지 아무도 묻지 않는 계속적인 성장에 매달려 왔다. 하지만 어린아이도 다 아는 단순한 진리는 바로 우리 지구가 제한된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지구는 자라지 않는다. 자연 자원도 늘어나지 않는다. 생물권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성장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의 유토피아는 제한된 공간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유토피아를 위해 현실을 무시하라는 나쁜 시나리오를 따른다면 경제와 성장을 말해도 좋다. 하지만 우리가 직접 대면하고 있는 현실이란 인간사회가 물질적 성장을 지속하다면, 조그마한 시험관인 이 ‘작은 행성’은 곧 터져버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이다. 점점 더워지는 기후와 다양한 종의 생명체가 사라져버린 메마른 풍경을 보면서 우리는 이미 그 징후를 느끼고 있지 않는가.
경제와 성장이라는 현재의 지배적 패러다임은 날조이다. 물론 어리석은 대중을 기만하는 허위선전 같은 것은 아니지만 이미 수백 년 동안 우리를 이끈 심오한 형이상학의 날조이다. 이 형이상학은 우리 인간이 결핍 속에서 살고 있고, 능력에 비해 충분히 잘 지내지 못하며, 때문에 그 결핍은 물질적 충족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처음부터 지금가지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성장하는 시장경제는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고통이나 결핍으로 흔들리기 쉬운 인간의 성정을 보호해야 할 뿐만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연약한 인간 존재를 극복해야만 한다. 이처럼 오직 경제적 세계관을 통해서만 활력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어느 날 만사가 다 해결되고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라는 성경의 구원 약속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경제학자 케인즈는 이런 무절제하고 난폭한 경쟁을 인식하면서도 그것이 불가피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1930년대 “앞으로 백 년 후에 ‘경제문제’, 즉 결핍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선한 것이 악이 되고 악한 것이 선이 되는 현상에 우리 모두가 속아 넘어갈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것은 악마와의 계약에 다름 아니다. 아름다움이나 사랑이 추해지고 괴물이 선해지도록 의도적으로 속이는 것이 악마와의 계약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경제가 성장하면 자연히 인간을 더 만족스럽게 할 것이라고 믿어 왔다. 경제력의 척도는 검증할 필요도 없이 ‘만족’의 척도였다. 그래서 GDP라는 어리석은 척도도 개발하지 않았던가. 태안반도에서 일어난 석유재난도 GDP를 높여준다. GDP 곡선이 계속 상승한다고 해서 인간이 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오랜 전에 증명되었다. 사람들이 찢어지게 가난해서 더 나은 경제활동을 통해 집 한 채 마련하는 그때까지는 GDP와 행복이 함께 간다. 하지만 그 수준을 넘어선 지 이미 오래다. 많은 나라들이 만족에 대한 임계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만족도는 더 늘어나지 않고 있다.
경제와 성장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우리는 점점 더 우울해 지고 있다. 물은 마르고 나무들은 쓰러지고 생활은 더 빨라지고 바빠졌다. ‘더 많이’와 ‘더 좋은’을 묶은 쇠사슬은 끊어져버렸고, 우리는 이 두 개가 서로 무관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전환점이다. 수백 년을 지내온 낡은 철학이 종말을 맞는 순간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왔던 경제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비경제적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시장은 사회의 나머지 부분과 떨어져서는 결코 커질 수 없다. 시장은 문화적 통념에 의지해서 규정될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인간은 수치화 가능한 알고리즘이 되어 버렸다. 경제성을 위한 중요한 결정들은 효율성에 따라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것은 더 이상 인간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 경제가 아니다. 원래 경제는 물질적인 결핍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높은 GDP를 이루기 위해 파괴와 손해를 탐욕스럽게 장부에 기입하는 지금의 경제는 얼마나 비인간적인가. 이런 경제척도와 비교하면, 자연은 확실히 비효율적이다.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큰 육식동물들은 자연이 생산한 것 중에서 가장 낭비가 심하다. 이 육식동물들은 고급 승용차처럼 절약할 줄도 모르고, 온혈동물이라는 그 자체가 이미 매우 비효율적이고 경제적이지 못하며, 아주 많은 폐열을 생산한다.
자연은 어디에서나 낭비를 일삼는다. 두 마리의 대구가 나오기 위해서 암컷은 5백만 개의 알을 바다에 뿌린다. 정말 심한 낭비 아닌가. 하지만 이것은 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즉 다른 협력자나 경쟁자,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품고 있는 전체 시스템이 이런 풍요로부터 먹고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자연에서 체험하는 풍요의 원칙이다. 이제 우리의 경제행위도 탐욕스러운 효율성이 아닌, 무절제, 무제한이 ‘생명의 원칙’임을 알아야 한다. 장사꾼이건, 정치꾼이건 우리 모두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생명의 원칙이 바로 우리 경제의 가장 중요한 모토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재성 칼럼 24]
이재성 /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실장 ssyi@kmu.ac.kr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