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민주주의는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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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들불처럼 번지는 시민저항, 독재의 그림자 드리운 지금 우리


튀니지에서 시작해 이집트를 거쳐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독재국가들에 부는 민주화 요구의 열기가 사막의 모랫바람처럼 거세다. 30년 전 독재정권에 저항하면서 민주화의 과정을 지켜왔던 우리로서는 남의 일이 아니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한 튀니지의 작은 도시 시디 부지드(Sidi Bouzid)에서 모하메드 부아지지(Mohammed Bouazizi)라는 청년의 분신으로 시작된 저항의 들불은 이제 튀니지를 뛰어넘어 인근 국가들로 빠르게 번지고 있다.

아랍문화권의 민주화를 위한 시민저항은 1월 25일 이집트를 시작으로, 2월 3일 예멘, 그리고 2월 5일 시리아로 확산되었다. 또한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2월 12일 알제리, 2월 14일 바레인에서는 미국, 유엔, 나토 등의 외국 정부나 기관의 도움 없이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시민저항이 예견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갑작스러운 사태는 아니다. 위키리크스는 아랍문화권 독재국가들의 불공정성과 권위주의적 체제를 이미 폭로한 바 있다. 이에 따르면, 미국 외교관들이 2008년에 튀니지 대통령과 그 가족들이 도적떼처럼 국가를 강탈하고 있다는 상세한 보고서를 자국 정부에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튀니지의 독재자 벤 알리가 망명하기 3일 전인 2011년 1월 12일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미국 정부는 튀니지 정부와 저항하는 시민 사이에서 그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을 것이다”며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있다.

미국의 이중적 태도는 이집트와의 관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미국은 지난 30년간 국가비상사태를 유지하며 어떤 야당도 인정하지 않고 저항세력을 고문하고 검열한 이집트 독재정권을 위해 1979년부터 매년 평균 13억 달러의 군사원조와 평균 8억1500만 달러의 재정지원을 해왔다.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은 “독재자가 아니다”라는 조셉 바이든 부통령의 공식적 발언은 더러운 미국 외교의 이중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지난 1월 25일 이집트의 민주화 요구가 본격화된 직후,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이 “무바라크 정부는 안정됐다”라고 평가한 바로 그 안정된 나라에서 인터넷과 휴대전화 차단이 이루어졌고, 시위대에 가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수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겨레> 2011년 2월 2일자 6면(국제)
<한겨레> 2011년 2월 2일자 6면(국제)

이집트 시민들은 독재자의 퇴진을 위해 종교적, 계급적 갈등마저 봉합하며 ‘우리는 하나’를 외치면서 스스로 질서를 잡아가고 있다. 그들은 ‘우리’라고 말함으로써 ‘공동의 시간의 공간 내에 존재’해 왔음을 확인한다. 복수로서의 ‘우리’는 통일로서의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공동의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역사’라면 공동의 시간의 공간 내에 존재하는 것은 ‘공동체’라 할 수 있겠다. 역사의 종언을 말하는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공동체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공동체는 기업과 같은 이익집단과는 다른 집단을 의미한다. 이때의 공동체는 강한 일체감과 집단적 존재를 바탕으로 한 지도자가 이끄는 ‘구성’된 집단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하나의 공동체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강한 힘에 의해 세워질 때 그것은 화석화되고 맹목적으로 변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의 사건들, 즉 나치즘, 파시즘 등을 통해서 이미 잘 알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장-뤽 낭시는 자본주의에 포획되어 기계적으로 제도화되어버린 민주주의에 영혼을 불어넣기 위해 ‘무위(無爲)의 공동체’를 주장한다. 공동체의 무위, 그것은 어떤 초월적 세계에 존재하는 공동체도 아니고, 사회와 완전히 분리된 어떤 남다른 인간들의 공동체도 아닌 사회의 배면에서 사회를 떠받치고 있는 공동체를 뜻한다. 말하자면 조직·기관·이념에 근거해서 성립된 공동체의 ‘차이’로서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 공동체는 구성‘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위의 공동체가 다가오도록 ‘내버려 두어야’만 한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능동적으로 접근할 수도 없고 거기에로 ‘열려 있어야’만 한다. 생존과 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자유·평등·박애를 가르칠 수만은 없다. 신자유주의의 무차별적 등가화의 폭력 속에서 배제와 포섭의 위협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국가의 이념을 교육시킬 수만은 없다. 그 모든 것이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에게 열려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유위(有爲)로 ‘구성’하려고 할 때 우리는 구체적 경험의 ‘현실’을 놓치고 말 것이다.

다소 관념적인 것처럼 보이는 낭시의 이러한 정치철학적 사유는 직접적인 혁명을 촉발하기보다 지식인들의 정치적 관점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교정을 요구한다. 사실 대부분의 모든 정치사상이 수신되는 곳은 일반인들이 아니라 지식인들이 아닌가. 마르크스가 당시에 『자본』을 노동자들이 읽으라고 쓰지는 않았던 것처럼. 그래서 지식인들에게 우선 요청되는 것은 이미 구축된 정치적 질서와 대립하는 보이지 않는 하부 공동체의 절망과 절규를 귀담아 듣고 거기에로 ‘열리고’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이름 없는 인간들의 공동체 사이의 대립과 투쟁은 아마 영원히 계속될 지도 모른다. 지속될 대립과 투쟁에 대한 무한한 긍정과 주목 그리고 참여하는 그곳에서 민주주의는 활짝 피어날 것이다. 민주주의는 결코 우리의 관념에 단박에 고정될 수 없는 무한의 운동이며 생성이다.

언젠가 낭시는 사회와 공동체 사이의 대립이 극단화된 형태, 즉 ‘혁명’이라 부를만한 것이 부유한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표명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독재국가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시민저항은 어떤가. 그리고 독재의 그림자가 드리운 우리 안은 어떤가. 우리는 지금 지극히 엄밀하고 확고한 판단과 행동이 요청되는 지점에 서 있다.





[이재성 칼럼 25]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사회연구소 연구실장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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