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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아이 고등학교 보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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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홍철 칼럼] "몽실언니 '최 선생' 같은, 그 여백이 남아 있을까?"


  여백의 시간

  지난 2009년 한 해를 우리 가족은 경북 의성의 시골마을에서 지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된 것이 계기라면 계기였다. “어떤 직장은 10년쯤 일하면 안식년이라는 것도 준다더라. 그 안식년을 맞으면 온 식구가 외국에 나가서 공부도 하고 견문도 넓히고 그런다는데, 우리 가족은 돈이 없으니 외국은 못 갈 것 같고 딱 1년만 시골생활을 해 보자.” 나는 그렇게 아내와 두 아이에게 제안을 했고, 모두들 동의해서 결행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훌륭한 애비를 둬서 이런 안식년까지 생기는 거”라고 생색을 내기도 했다.

  내가 종종 “고추 몇 근, 콩 몇 말, 깨 몇 되, 배추 몇 포기에 시(詩)까지 몇 편 수확한 풍족한 한 해”였다고 친구들에게 말하곤 하지만, 어쨌거나 짧은 기간이었음에도 우리 가족 모두에게 그 한 해는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안식년’이었다. 특히 아이들에게는 앞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더없이 소중한 체험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때 중학교 2학년이었던 아들놈은 동급생이 전교에 다섯 명밖에 안 되는 작은 공립학교에서, 행복한 학교생활을 했다.

  물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금의 우리 농촌 현실 속에서, 그곳 아이들이라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야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대도시의 아이들에 비해 시골 작은 학교의 아이들은 분명히 건강하고 밝았다. 아들놈과 친구들은 ‘학원이 없는’ 마을에서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나 공부에 대한 강박 없이 신나게 잘도 놀았고, 공부할 때도 늘 모여서 서로 기꺼이 도와주었다. 특히 체육이나 음악, 미술 같은 과목들은 도시의 큰 학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수업 조건이 훌륭했다. 교사들이 아이 하나하나에게 거의 개인 교습을 하듯이 수업을 할 수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들놈은 지금도 그때 체육시간에 탁구를 (자기 말로는) ‘제대로’ 배운 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워낙에 학생이 적은 지역이다 보니 선생이나 친구들이 전학 온 아들놈을 참으로 ‘소중한 존재’로 대해 주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제 여섯 명이 되었으니 편을 짜서 축구를 할 수도 있다”면서, 유난히 체구가 작은 아들놈을 ‘귀한 선수’로 기꺼이 대우해 준 것이다. 수업을 마친 아들놈이 친구들과 웃고 떠들면서 학교정문을 나와 가을이 물든 오후의 언덕길을 내려오는 모습을 멀리서 본 적이 몇 번 있는데, 이 나라의 참혹하고 남루한 ‘교육 현실’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한 ‘착각’마저 잠시 들었다.

  그런 너그러운 분위기에서 1년을 지내면서 아이는 전에 비해 자신의 삶에 대해 훨씬 낙천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고, 학습노동에 대한 부담이 없는 여유로운 환경이 오히려 ‘스스로 공부하는 즐거움’을 깨닫도록 해 준 것 같았다. 인간의 성장기에는 무엇보다 그런 ‘여백의 시간’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 가족 모두 절실히 깨달았다.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대구로 돌아올 때에도 아들놈이 가장 서운해 했는데, 무척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내 아이에게뿐만 아니라, 더없이 큰 사랑과 우정을 베풀어 준 그 학교의 교사들과 아이의 친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대구로 돌아와서도 아이는 그곳에서 사귄 친구들과 자주 전화도 주고 받으면서, 그럭저럭 중학교의 마지막 1년을 잘 지냈다. 수업이 끝나면 시골에서 그랬던 것처럼 ‘학원을 다니지 않는’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온갖 놀이에 몰두하면서 유쾌하게 잘 놀았고, 시험기간에는 친구와 같이 밤늦도록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을 서로 가르쳐 주기도 했다. 아마도 우리 동네가 ‘사교육열’이 상대적으로 높지 않은, 고만고만한 형편의 서민들이 밀집해 사는 지역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여백’이 아이들 사이에도 허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나 싶다.

  학교란 무엇인가, 공부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들놈이 며칠 전부터 걱정스런 표정을 자주 짓는다. “다른 애들은 학원도 다니기 시작하고 고등학교 공부를 미리 다 해간다는데 나는 아무래도 혼자서 하니까 진도가 안 나가서 걱정”이라고 털어놓는다. 왜 그런 걱정이 안 들겠는가. 얼마 전 입학할 고등학교(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에 배정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예비소집에 가서 받아 온 학교생활안내 책자를 보니, 솔직히 나도 긴장이 되었다. 이제 드디어 나도 고등학생 학부모가 되는 건가, 하고. 아이한테는, “요즘 유행하는 이야기가 있다. 할아버지의 재력과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이 삼박자를 갖춰야 일류대를 갈 수 있다는데, 다행히 우리 가족에겐 첫 번째와 두 번째 조건은 ‘제로’인데다가 아빠는 무관심하기는커녕 걸핏 하면 ‘학교는 언제든 그만둬도 좋다, 걱정 마라’는 식으로 지나치게 너희들 학교 문제에 잔소리가 많은 편이니, 너는 아예 일류대 같은 문제에서 완전 자유롭지 않으냐, 그러니 고등학교를 간다고 새삼 걱정할 게 뭐냐” 하는 식으로 시시때때로 격려(?)를 하지만, 그 정도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아이의 부담감을 씻어 줄 만큼 현실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은 나도 알고 아이도 잘 알고 있다.          

  이 또래 아이들이 지금 대개 다 그렇겠지만, 아들놈은 벌써부터 고등학교에 가면 새벽같이 등교해서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야자’를 해야 한다는 사실(엄청난 학습노동시간)에 거의 공포감을 느끼고 있다. 소문에 듣자 하니 어느 고등학교는 입학식을 하기도 전인 2월 중순부터 입학예정인 아이들을 학교에 등교시켜 ‘선행학습’을 시키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로부터 일체의 ‘여백’을 몰수해 버려야 ‘공부’를 잘 할 수 있다는 가학적이고 파시즘적인 신념에 고등학교 선생들이 전부 사로잡혀 있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아들놈에게 “만약 네가 0교시 수업이나 ‘야자’를 하기 싫으면 당연히 거부할 권리가 있다. 그럴 경우, 무슨 수를 써서든 애비도 너를 지지하고 지원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만약 그런 문제 때문에 학교에서 불편한 일을 당하거나 하면, 늘 얘기했던 것처럼 언제든 학교는 그만둬도 좋다. 공부는 꼭 학교에서만 하라는 법은 없다” 하면서 다시 한번 등을 두드려 줄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나의 진심이기도 하거니와, 아들놈이 자신의 '걱정'과 애비의 과격한 ‘격려’ 사이에서 “학교란 무엇인가, 진정한 공부란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떤 인생을 살기를 원하는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권정생 선생의 작품 <몽실언니>에는 우리가 ‘공부’라는 화두를 놓고 생각할 때 깊이 새기고 기억해야 할 대목이 나온다. 해방 이후 좌와 우, 남과 북으로 갈려 온 산하와 가난한 백성들이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고 있던 1949년 겨울쯤이다.

권정생 소년소설 '몽실언니' / 창작과 비평사(2007)
권정생 소년소설 '몽실언니' / 창작과 비평사(2007)
  이미 전쟁의 포성이 저만치서 들려오는 듯한 팽팽한 긴장 속에서, 몽실이가 새어머니와 살던 노루실 마을에 국민학교 최 선생이 야학을 연다. 허름한 동네 창고에, 글 모르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많든 적든 모아놓고 가르치던 그 야학에서 어느 날 최 선생은 이런 이야기를 학생들에게 들려 준다. 

  “누구든지 길을 가자면 그 길의 멀고 가까움과 어느 정도 험한가 평탄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지요. 우리들이 지금 공부를 하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가, 그 길의 내용을 정확히 알고 가자는 데 있는 것입니다.”


  최 선생의 이야기는 이렇게 이어진다. “개인의 인생은 물론 우리 마을, 우리 국가의 앞날에 어떤 장애들이 있는가 미리 잘 알아서, 우리는 튼튼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 지금 남북이 갈라져서 서로 다투고 있는 것도 과연 남의 꼭두각시 놀음이 아닌, 제 스스로의 생각을 주장하고 있는지 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르면 언제든지 속게 마련입니다. 속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 정신차려 똑똑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주인공 몽실이는 비로소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는 아이가 되어 간다. 그리고 자기의 일만 아니라 어머니의 일도 아버지의 일도, 그리고 이웃의 살아가는 모습도 눈여겨보게 된다.

  며칠 뒤면 아들놈이 새 교복을 입고 들어설 그 고등학교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 줄 선생이 한 분이라도 있을까?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선생이 아이들에게 진지하게 들려줄 수 있는 ‘여백’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일까? 더 이상 학교와 선생들이 아이들을 속이고 협박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변홍철 칼럼 2]
변홍철 / 물레책방 인문학연구실장. 전 녹색평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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