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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정치권력, 시장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의 오만과 횡포에 맞서"


필자는 지난 7월 18일자 한겨레신문에서 청전 스님의 ‘간디가 한국 사회에 던지는 7가지 경고’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인도 국부 마흐트마 간디가 세운 7가지 원칙이라는 내용이다. 스님의 글에 따르면 7가지 원칙은 "첫째, 원칙 없는 정부는 망한다. 둘째, 노동 없이 취하는 부(富)는 망한다. 셋째, 양심 없는 쾌락을 취하는 자는 망한다. 넷째, 인격 없는 교육은 망한다. 다섯째, 희생 없는 신앙은 망한다. 여섯째, 도덕 없는 경제는 망한다. 일곱째, 인간성 없는 과학은 망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아무런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우리 사회의 현재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굳이 하나 더 추가한다면 ‘생태적이지 못한 삶은 망한다.’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원칙이 없는 정부, 노동이 없는 부의 축적, 비도덕적인 쾌락 추구, 인격이 없는 교육, 희생이 없는 신앙, 도덕이 없는 경제, 그리고 인간성이 없는 과학이 축조해낸 한국 사회의 모습은 "비디오테이프에 기록되고, 캠코더에 녹화되고, 감시당하고, 감독당하고, 문서화되고, 분류되고, 항목별로 나눠지고, 암호가 부여되고, 사진 찍히고, 인가되고, 디지털화되고, 바코드가 찍히고, 범주화되고, 국가 커리큘럼으로 만들어지고, 할인 카드화되고, 사은품으로 받는 보너스 카드화되고, 체계화한 시스템의 일부가 되고, 유전자 기록이 보관되고, 폐쇄회로 화면에 잡히고, 접근통제 카드화되고, 신분증명 카드화되고,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고, 인구조사 꼬리표가 붙고, 측정되고, 평가되고, 차례로 나열되고, 스캐닝되고, 돌려지고, 감정되고, 위계를 부여받고, 대상화되는" 그런 곳이다. 숀 쉬한의 『우리 시대의 아나키즘』에 등장하는 한 대목이다. 저자가 현대 사회의 ‘정상적인’ 특징이라고 표현한 이런 사회의 모습은 수동적으로 지배를 받은 시민들이 복종하는 태도로 자기 자신을 감시하도록 순종적인 역할을 내면화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정치적 홉스주의, 물신화, 문화 경시, 대량 소비, 약자 멸시, 무한 경쟁, 노동 경시, 언론 통제, 환경 파괴 등 곳곳에서 민주주의의 균열과 위기가 고조되었다고 분노하지만 그 분노는 국가 권력의 억압과 통제 앞에서 무기력한 시민들을 저항으로 내세우는데 역부족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리가 목표해야 할 것은 무엇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재 상황을 거부하는 것, 즉 불복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처럼 사회적, 정치적 정체성을 마치 자연적이고 불변적인 것처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순응적이고 복종적인 개인으로 원자화되어 버릴 것이다.

이렇듯 복종의 내면화가 완성되면 필자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외부의 권위에 의해 정신이 스스로 부과하는 사회적, 지적 제약에 갇혀 버리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사회적 제약에서 현실추수주의자가 되고, 지적 제약에서 지식기사가 되는 부자유한 잉여인간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모든 곳에서 족쇄에 갇힌 정신적 불구자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모든 곳에서 족쇄에 갇혀 있다.”는 루소의 통찰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유효한 것은 이러한 역사성의 역설 때문이다. 물론 루소의 이러한 선언이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 이미 삶의 환경에 제약되는 운명적 존재일 뿐이라는 절망의 탄식이었는지 아니면 저항의 분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우리는 ‘갇혀 있다’는 말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갇힘’을 ‘열림’으로, ‘접힘’을 ‘펼침’으로 읽어내야 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 ‘당위’의 차원에서 그렇다. 그래야만 인간은 로고스를 넘어 파토스로 이행할 수 있다. 파토스적 존재, 즉 열정이 없는 인간은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하다. 인간을 ‘정신적 족쇄’에만 가두게 될 때 인간의 열정을 가능케 하는 욕망 내지 에너지는 전면적으로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욕망을 억누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욕망이 억눌려질 만큼 허약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욕망의 억제자인 이성은 욕망으로부터 그 위치를 전달하고, 저항하는 욕망을 지배한다. 그리고 욕망은 억제당하면서 점차 수동적으로 되어가고, 마침내 그저 욕망의 그림자가 돼버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갇힘에서 벗어나 열림의 즐거운 삶을 추구하는 인간의 능력을 훼손하는 온갖 권위의 형태는 거부되어야 한다. 인간존재는 소외와 계급착취가 극복되기 전에는 결코 완성될 수 없으며, 그 이후에 열릴 상황은 상상력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마르크스의 생각처럼 인간의 삶의 가능성들은 일 내지 노동의 세계를 넘어서 있다. 진정 해방된 세계는 사람들이 일 내지 노동을 중심으로 자신의 삶을 구축하도록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열려 있듯이 모든 것은 언제나 되어감, 즉 생성의 상태에 있다. 그 생성 과정에서 열정으로 가득한 저항은 온전히 숨 쉴 수 있다.

최근 93세의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의 자유인 스테판 에셀이 우리에게 자본주의가 구축한 “대량 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 언론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위해 분노하라고 외치며 오직 ‘저항’만이 ‘창조’임을 역설하고 있듯이, 지금 여기서 우리에게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정치권력과 시장권력, 그리고 더 나아가 무자비한 언론 권력의 오만과 횡포에 맞서 창조적 저항 의식을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될 것이다.






[이재성 칼럼 29]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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