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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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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성장주의의 피폐한 아우성 뿐...시대를 읽고 미래를 준비하자"


지난 30년을 되돌아보면 우리사회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특히 눈에 띄는 변화는 물질적 욕망의 무한 성장이다. 당장 3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삶의 관건은 먹고 사는 문제였다. 그 대신 인간 삶의 많은 가치들, 정의, 자유, 평등, 민주주의 등은 배제되어야 했다. 사회 전반적으로 성장의 파이를 키우자는데 대한 묵시적 동의가 있었다. 그 공간에서는 침묵과 복종 그리고 피와 땀이 중요했고, 그 중심에는 우리 지역이 있었다. 그렇게 탈취한 권력과 자본은 지역의 자부심이었고 자랑이었다. 훗날 이것이 결국에는 우리 지역을 옭아매는 주홍글씨가 될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민주화를 총칼로 짓밟은 새로운 권위주의의 등장과 뒤이은 지역 권력의 패권화는 지역의 변화와 개인의 성장을 또다시 차단했고, 자부심과 자랑의 허세 병을 연장시켰다. 그 사이 지역의 병은 깊어갔고, 자만심을 넘어 똥고집으로 악화되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각종 질병들에 노출된 치유불가능한 상황이 된 듯 하다. 남은 건 조절 없는 욕망을 추구하는 강한 성장주의의 피폐한 아우성뿐이다. 그 과정에서 또다시 ‘지역민의 피와 땀’을 요구하는 무도한 성명서와 글들이 지역 언론을 도배하고 있다. 정말이지 인간에 대한 근본적으로 예의가 없는 태도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피와 땀인가?

지역의 새로운 삶의 방향을 외치는 작은 주장들은 있으나 거의 들리지 않는다. 여전히 성장과 개발만이 살길임을 지역을 뒤덮은 ‘밀양 신공항’ 현수막에서 그리고 ‘과학벨트’ 나누어먹기 담론에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한계를 모르는 물질에 포획된 정신은 이성적 통제력을 상실해 버렸다. 중앙에서는 지역의 내부 분열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중앙의 이토록 완고한 중앙주의 실현은 지난 30년간 누려온 우리 지역의 자부심과 자랑의 결과가 아닐까.

전공 근본주의, 학문의 위기 자초한 대학

정신과 물질이 제 갈 길을 잃어버린 이 지점에서 필자는 「계명대학교 목요철학원」이 제시한 아주 작은 변화에 주목한다. 「계명대학교 목요철학원」이 「목요철학세미나」로 처음 출발한 날은 1980년 10월 8일이다. 참으로 어둡고 힘든 시기였다. 정치적 권위주의와 경제적 개발주의가 우리사회를 주도하던 시절이다. 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팽개쳤던 시절이다. 그런 시절에 한 대학의 학과에서 권위적이고 고답적인 대학의 환경에 새로운 생각이 가능한 열린 공간을 마련했던 것이다. 각자의 주장이 없었던 그 암울한 시절에 각자의 주의와 주장을 가능하게 했던 공간으로 마련되었던 것이 바로 「목요철학세미나」였다.

지난 30여 년간 국내외 여러 석학 및 연사들의 강연과 수많은 청중의 열띤 토론이 함께 어우러진 이 목요일의 ‘향연’은 ‘우리시대의 금자탑’이라는 수사를 얻기도 했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흥분하고 분노하며 시대를 고민하는 모든 젊음의 지적 욕구들이 분출되고 용해되는 열린 공간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대학과 사회의 경계가 무너진 오늘날 대학의 공간은 이미 개방성을 상실한 채 전공 근본주의에 빠져 스스로 학문의 위기를 자초하고 있다. 「목요철학세미나」가 「계명대학교 목요철학원」이라는 이름으로 대학을 벗어나 사회로 나온 이유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이 거칠고 야만적인 시대에 인문학을 들고 지역 시민을 향한 걸음을 내딛었다.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지역 시민 모두를 이 열린 공간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거기에는 거창한 구호도 거대한 담론도 없다. 패션과 첨단의료복합보다는 오히려 교육과 문화의 도시를 먼저 생각한다. 새로운 정신문화의 기틀을 마련해 갈등과 반목으로 들떠 있는 사람과 세상을 치유하고자 한다.

지금 우리사회의 모습은 잠깐 눈을 돌려 보면 알 수 있다. 각자가 자기의 주장만 내세우지 너의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거칠어져 있다. 인간은 사람 인(人)과 사이 간(間)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관계 맺기’를 통해서 존재한다. ‘관계와 관계’ 사이에는 모여서 하나의 덩어리를 만들기 위한 ‘결’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 결은 올바른 교육이 없을 때 거칠어진다. 다시 만나지 않을 생각이 드는 사람에 대해 때때로 가지게 되는 무례와 무심함이 거친 ‘결’의 한 형태이다. 올바른 교육이 사라진 무제한적 욕망과 무한 경쟁의 승자독식 사회가 남긴 결은 타자에 대한 무례와 무심함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인문학적 상상력이 부(富)가 되는 시대를

힘들겠지만 우리의 본래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근본인 인문학으로 돌아가는데 있다. 인문학을 공부하고 학습하면 사람 사이의 결을 부드럽게 할 수 있다. 공부를 통해 알게 되고, 학습을 통해 그 자극을 상시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학습(學習)이 중요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머리로 아는 것을 가슴으로 숙성시키고 마침내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학습이다. 따라서 인문학이 가지는 개인적 차원의 의미는 나와 관계 맺고 있는 너와 우리(사회)의 결을 부드럽게 만드는 학문이 될 것이다.

자연과 자연,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하는 성장이 아니라 인문학적 상상력이 부(富)가 되는 시대를 만들어야 한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미래의 지식기반 사회가 심화될수록 더 핵심적 기능을 갖게 될 것이다. 미래는 인문학적 성찰이 예전의 토지나 자본처럼 빈부를 가르는 기반이 될지도 모른다. 인문학적 상상력이야말로 협동보다는 경쟁, 전체보다는 부분, 유기체보다는 기계, 의미보다는 사실, 관계보다는 개체, 변화보다는 불변, 유기체적 불확실성보다는 기계적 확실성을 선호하는 우리들의 마음을 치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인문학적 상상력은 시대를 읽고 미래를 준비한다. 인문학은 과거의 역사를 들추고 삶의 의미와 가치를 말하며 윤리를 이야기한다. 인문학의 주체인 인간의 의식은 니체의 말처럼 유기체에서 가장 뒤늦게 발전된 것이며, 따라서 가장 미완성이고 가장 무력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의식적 기능은 충분히 교육되어 성숙하기 전까지는 유기체에 위험하다. 의식적 인간에게 인문학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시대를 반성하고 나 자신을 되돌아볼 성숙의 기회를 주기 때문이지 문제에 대한 새롭고 탁월한 해법을 제공해 주기 때문은 아니다.

인문학의 근본적 가치는 공공성에 있다. 여기저기서 인문학을 말하고 ‘인문학의 열풍’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인문학은 결코 시장과 자본에 의해 충분히 뒷받침될 수 있는 학문이 아니다. 인문학의 효능과 질감은 인간들 사이의, 문화들 사이의, 텍스트들 사이의, 작품들 사이의, 현재와 과거 사이의, 현존하는 것과 현존하지 않는 것 사이의, 자연과학적으로는 검증되지 않는 이해와 소통을 확장하고 심화시켜, 야만스러운 불화를 줄이고 인간의 자기이해와 인간적 삶의 이념들을 형성해 나가는 것에서 확인될 수 있다.






[이재성 칼럼 27]
이재성 / 계명대 교양교육대학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ssyi@km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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