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수’를 보면 재미있다. 조관우가 가성으로 노래 부르는 모습을 보면 진성으로도 음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나로서는 신기할 뿐이다. 박정현이 그 예쁜 목소리로 “나~ 슬퍼서 살아야 하네”라는 대목을 부를 때는 마음이 아려서 혼났다.
모든 분야에서 경쟁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 속에서 ‘나가수’와 같은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재미있다고 말하면 팔자 좋다는 이야기를 들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뿐만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텔레비전에서 벌이고 있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다. 사람들은 경쟁이 지겹지도 않은 것일까?
서바이벌 프로그램으로 말한다면 스포츠는 이미 노골적이다. 경쟁을 조건으로 하여 선수들은 경기에 참가한다. 경기에서 선수들이 서로 경쟁하는 광경을 보며 사람들은 열광하고 또한 감동한다. 100미터 육상 경기에서 0.01초의 기록이라도 단축시키기 위해 선수들이 숨도 멈추고 내달리는 것을 보면 우리는 생명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거룩함에 대해서 다시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나가수’에서 그러한 감동을 엿본다. 자신의 잠재력과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한 곡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가수들에게서 경쟁의 고단함보다는 생명의 충실한 긴장감을 발견한다.
이를 경쟁의 미학으로 부를 수 있을까. 경쟁이 무릇 미학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경쟁은 철저히 수단으로 내려앉아야 한다. 경쟁을 통해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인간 실존에 대한 겸허한 대면으로 향해야 한다. ‘나가수’의 경연장에서 조관우가 “걱정되는 사람은 오직 나 밖에 없다”라고 한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정직한 고백이다. 그에게 있어서 어느덧 다른 사람과의 경쟁은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 절박한 것은 최선을 다하여야만 하는 자신의 의지이다.
문제는 현장의 삶에서 경험하는 경쟁의 모습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 경쟁한다. 남을 짓누르고 파괴시켜야 살아남는다. 적당하게 교활하고 기만하지 않으면 도태되어 버리는 현실이다. 속살을 발갛게 드러내고 누군가 조금이라도 그곳을 건드리기만 하더라도 우리는 도저히 아파서 견디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누군가에게 덤벼든다. 이 경우 경쟁은 그 스스로가 목적이 된다. 이기는 것만이 절박한 염원이다. 이건 경쟁이 아니라 전쟁이다.
자본주의가 시장 원리를 존중하는 것은 경쟁의 미학에 대한 순결한 희망 때문이다. 자본주의에서 시장은 곧 경쟁을 의미한다. 경쟁이 인간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혁신을 촉진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질 때 자본주의는 제대로 기능한다. 그런데 경쟁이 목적이 되고 시장은 물신화되면서 자본주의는 전쟁이 되어 버렸다. 김진숙을 타워크레인 꼭대기까지 몰아버리고 꼼짝달싹하지 못하게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전쟁의 결과다.
대구에서 국제육상선수권대회가 곧 열린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끌어올리기 위해 청춘을 바치고 있는 세계의 젊은이들이 함께 모인다. 이 아름다운 청춘과 빛나는 경쟁의 의미를 대구가 호스트가 되어 그 마당을 제공한다. 내부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려고 하는 인간의 분투에 대해서 경외감을 가지고 응원하면서 그 감동을 전 세계에 전달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감동을 대구 발전의 새로운 에너지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강제로 떠맡긴 표가 사표가 되어 자리가 텅 비어 버릴 것을 걱정하는 소리가 들린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쟁의 향연을 유치하고는 마치 전쟁하듯 가장 유치한 방식으로 준비하고 있는 지역사회의 담대함. 경쟁과 전쟁 사이의 예민한 간극을 이해하지 못하는 천진성.
임재범의 노랫말에 나오는 ‘전쟁같은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경쟁과 전쟁의 이야기로 새버렸다.
[김영철 칼럼 26]
김영철 / 계명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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